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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익창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770
한자 吳益昌
영어음역 O Ikchang
이칭/별칭 유원(裕遠),사호(沙湖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유학자
출신지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성별
생년 1557년연표보기
몰년 1635년연표보기
본관 함양

[정의]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유학자.

[가계]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유원(裕遠), 호는 사호(沙湖). 부원군 오광휘(吳光輝)의 후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전라좌수우후를 지낸 오숙(吳淑)이고, 할아버지는 진사 오세영(吳世英)이다. 아버지는 진사 오인(吳寅)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이학(李鶴)의 딸이다. 첫 번째 부인은 함풍이씨(咸豊李氏)로 이유겸(李惟謙)의 딸이고, 두 번째 부인은 서산유씨(瑞山柳氏)로 현감을 지낸 유형진(柳亨進)의 딸이다. 자녀로는 오전(吳晪) 등이 있다.

[활동사항]

오익창(吳益昌)은 10세 전에 경전을 외웠다. 1571년(선조 4) 성리학과 산수에도 통하여 부로(父老)의 총망을 한 몸에 모았다. 1579년(선조 12) 사마시에 합격하여 문명을 떨쳤으며, 1594년(선조 27) 흉년으로 큰 기근이 생기자 사재를 풀어 많은 인명을 구제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수군통제사로 한산도에서 일본군과 대적하고 있을 때, 원균이 참패하여 나머지 피난하는 선박들이 우리 군세의 미약함을 보고 섬으로 달아나려 하였다. 이에 오익창이, “우리 모두가 통제사를 돕지 않으면 왜적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오. 통제사가 패하면 국토는 어육이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곳에 가서 목숨을 보존할 것인가.” 하고 호소하며 이해로 달래고 의리로 깨우쳐, 피난선을 모두 모아 전선 뒤에 나열하여 군대를 성원하며 군량미를 거두어 도왔다.

통제사의 군대가 추위를 못 견딜 때 피난선에 타고 있는 뱃사람들을 설득하여 옷을 벗어 주게 하였으며, 솜이불 백여 채를 보내어 물에 적셔 배 위에 걸어 적의 탄환이 뚫지 못하게 했다. 또 군사가 노를 저으면서 갈증에 시달릴 때 그가 배에 가득히 싣고 온 동아[冬瓜]로 구원했는데, 사람들이 피난하면서 버린 동아를 거두어들인 연유를 모르다가 이에 이르러 그 지략의 주도함에 모두 놀랐다.

통제사도 그 선견지명에 탄복하여 군중 대소사를 그와 상의하면서 “이번 싸움에 성공하면 그 공은 오로지 오익창의 힘이오.”라고 하였다. 적이 물러간 뒤 오익창의 성망이 조정에 알려져 특별히 제원도찰방(濟源道察訪)에 제수되어 명나라 구원병의 접대에 한 치의 차질이 없었다. 또한 주민을 위무하여 칭송을 모았으므로 그의 유애비(遺愛碑)가 세워졌다. 뒤에 종부시직장, 의금부도사, 사헌부감찰, 공조와 형조의 좌랑과 정랑을 두루 지내고, 광해군 대에 낙향하여 심원면 월산에 정자를 지어 노년을 보내고자 하였다.

오익창은 호남 오신(湖南五臣)[기축사화에 화를 입은 정개청(鄭介淸), 이발(李潑), 이길(李洁), 유몽정(柳夢井), 조대중(曺大中)]의 원한이 오래도록 풀리지 않자 호남의 여러 선비들과 함께 상소하여 신원을 간청하였다. 그 일절을 들면, “적을 성토하는 데 원정을 살핌은 춘추의 법도요, 옥을 다스리는 데 무고함을 가림은 성왕의 전법이온데, 앞에 든 신하들은 호남인이고, 신들 또한 호남인으로서 여러 신하들의 죄를 나라 사람들이 모두들 원옥이라 하고, 보고 듣는 바에 신들보다 더 절박함이 없으니 그 원옥을 알고도 상감에게 아뢰지 아니함은 신들의 죄 또한 큽니다.”라고 하였다. 이괄(李适)의 난에는 아들 오전으로 하여금 군량을 모아 근왕(勤王)하게 하였고, 정묘호란에도 군량을 모아 강화도로 보냈다. 1635년(인조 13) 8월 14일 심원에서 7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사상]

오익창은 언제나 성리학에 마음을 두어 밤을 낮으로 삼아 경전을 탐독했고, 더욱이 정주(程朱)의 글을 좋아하여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는데, 언제나 말하기를 “격물(格物)은 치지(致知)의 요체이니, 사물에 접하지 않을 수 없고, 박문(博文)은 약례(約禮)의 기본이니 글을 널리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백가서를 두루 탐구하였다. 이에 역학(易學), 병학(兵學), 예악, 산수의 오묘함에 이르기까지 터득하지 아니한 것이 없어서 일에 다달이 능히 대처해 나갔다.

당시에 교유한 선비로는 곤재(困齋) 정개청, 호암(壺巖) 변성온(卞成溫), 백호(白湖) 임제(林梯) 등으로 당대를 대표하는 사림들과 도의로 사귀었다. 임제와는 선운사에서 여러 날을 함께 지내기도 했는데, 이때 임제가 “호남에 그대 아니면 내가 독보적이었을 것이오.”라고 했다고 전한다. 변성온김인후(金麟厚)의 문하에서 경전의 깊은 뜻을 얻어 들었음에, 「무극론(無極論)」을 지어 이기(理氣)가 소장(消長)하는 이치를 보여 주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사호집(沙湖集)』 3권 2책이 있다.

[묘소]

묘소는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호암마을 뒷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선무원종일등공신으로 책록되었다. 효종우암 송시열이 이조를 맡아 보면서 시문(時文)을 상고하다가 오익창의 공을 발견하고 경연에서 아뢰어 “예전에 정랑 오익창은 정유재란에 이순신을 도와 훈업이 현저하고, 정묘호란에 군사를 모으고 군량을 수송하여 전후 충의 대절이 우뚝하옵기에 그에 상당한 은전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오이다.” 하여 중훈대부를 추증했다.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오익창이 거북선 제작에 참여한 것으로 나온다. 1713년(숙종 39) 전라도 유림의 공의로 죽산사(竹山祠)를 건립하여 배향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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