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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454
한자 朝鮮時代
영어음역 Joseonsidae
영어의미역 Joseon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주명준

[정의]

1392년에서 개항기까지의 전라북도 고창 지역의 역사.

[개설]

현재의 고창은 고창현무장현(茂長縣), 흥덕현(興德縣)이 통합되어 성립되었다. 고창현은 고려 시대에 상질감무가 겸무하였다. 조선 초기인 1401년(태종 1)에 비로소 고창현에 감무를 두었으며, 1455년(세조 1) 지방 방위 조직의 개편에 따라 나주진관(羅州鎭管)의 속읍이 되면서 현감을 파견했고, 속오군(束伍軍)은 입암산성에 속하였다.

무송현장사현은 1417년(태종 17) 무장현으로 통합되면서 진(鎭)을 두어 병마사가 파송될 정도로 군사적 요충지였다. 1423년(세종 5) 첨절제사로 바꾸었다가 1482년(성종 13) 현감으로 고쳤고, 1836년(헌종 2) 군으로 승격되었다.

흥덕현은 고려 시대에 감무가 파견되어 고창현과 함께 다스렸다. 조선 초기인 1401년(태종 1)에 고창에도 감무를 두게 되자 흥덕과 고창은 갈라서게 되었다. 흥덕현은 조선 초기에 전국에 15개의 진이 설립될 때 전라도에 편성된 4개의 진 가운데 하나였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흥덕현은 1455년(세조 1) 전주진관의 속읍이 되었고, 감무를 현감으로 고쳤다.

1895년 지방 제도의 개편에 따라 고창현은 고창군으로 승격되어 전라북도에 편입되었다. 무장군은 전주부에 소속되었다가 이듬해 전라남도에 편입되었고, 1906년 다시 전라북도에 편입되었다. 흥덕현은 1895년에 흥덕군으로 승격되었고, 1904년에 고부군의 부내면(富內面)과 부외면(富外面)을 병합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3개의 고창군, 무장군, 흥덕군이 하나로 합쳐져 고창군이라 칭해졌으며, 1935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14개 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관원과 호수]

고창현무장현, 흥덕현에는 각각 1명의 현감이 중앙에서 파견되었는데, 세 현의 관원은 다음의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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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조직 외에도 향청이라는 자치기구가 있어 좌수·별감 등의 임원을 두었다. 이 향청의 임무는 주로 지방 행정에 관해 수령의 자문에 응하고 풍기를 단속하며 향리들을 규찰하여 수령을 보좌하는데 있었기 때문에 수령 다음 가는 이아(貳衙)라고 하였다.

1420년(세종 2)에 무장향교가 설립되었고, 1512년(중종 7)에 고창향교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1621년(광해군 13)에 흥덕향교가 설립되어 이 지방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1466년(세조 12)에 전국을 진관 체제로 개편하여 국방 제도를 완비할 때 흥덕은 전주 진영에 속하였고, 고창과 무장은 나주 진영에 속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나타난 고창현의 호수는 164호, 인구는 974명, 무장현은 호수 356호, 인구 2,033명, 흥덕현은 호수 216호, 인구 1,051명이었다. 특히 고창 지방에는 조선 시대에 해군의 군사적 요충지로 중시되면서 봉수대가 축조되었다. 무장현고리포 봉수소응포 봉수가 설치되어 국가의 위급 사항을 중앙에 올렸다. 고창 지역 봉수(烽燧)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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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경제]

고창 지역은 학자와 충신, 효자, 열녀가 많이 배출된 곳이다. 오익창(吳益昌)『사호집(沙湖集)』, 황윤석(黃㣧錫)『이재유고(頤齋遺稿)』, 강응환(姜膺煥)『물기재집(勿己齋集)』 등 저명한 학자들의 문집이 간행되기도 했다. 『고창삼향지』에 의하면 고창 지방의 성씨는 신천강씨(信川康氏)를 비롯해서 139개라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고창 3현의 토지 결수는 고창현이 2,235결, 무장현은 5,895결, 흥덕현은 3,134결이었다. 『고창삼향지』에 의하면 조선 말기 고종 때의 토지는 고창이 1,651결, 무장이 5,067결, 흥덕이 3,539결이었다.

토산품은 고창현이 감·벌꿀·대나무·은어·석류·자기·차 등이고, 무장현은 조기·새우·상어·숭어·오징어·넙치·홍어·준치·부레·화살·차 등이며, 흥덕현은 조기·숭어·은어·청어·오징어·게·황합(黃蛤)·화살·자기·지황·유(油) 등이다.

조선 시대 육상 교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역참(驛站)이다. 전라도에는 벽사도, 오수도, 경양도, 제원도, 청암도(靑巖道), 삼례도 등이 설치되었는데 고창 지방은 청암도에 속한 청송역이 있었다. 청송역무장현 소속으로 현에서 동쪽으로 10㎞ 정도 거리에 있다.

역과 함께 도로 교통 기능 가운데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원(院)이다. 전국의 요로에는 원이 있어서 관리들의 출장 중 숙박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있었다. 원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잘 나타나 있다. 무장현 관내에는 사신원(四信院), 청계원(靑溪院), 요광원(要光院) 등이 있었고, 고창현 관내에는 반룡원(盤龍院), 인계원(仁戒院) 등이 있었으며, 흥덕현 관내에는 해천원(蟹川院), 구을원(仇乙院), 갑향원(甲鄕院) 등이 있었다.

고창 지방의 조세로 징수한 세곡을 서울로 운반하기 위해 조운(漕運)이 행해졌다. 전라도의 조운과 조창은 덕성창과 법성포창이 중심지였는데, 고창·무장·흥덕 등의 세곡은 모두 법성포창으로 운반되었고, 여기서 군산을 경유하여 서울로 운송되었다.

[고창과 의병]

1. 임진왜란과 의병

유한량(劉漢良)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했던 당시에 무장현감으로 진주성 싸움에서 격전을 벌이다가 성이 함락되던 날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고창현김홍우(金弘宇)를 중심으로 한 친족들은 김경수, 기효간, 윤진 등과 함께 장성 남문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과 군량을 모아 행재소와 타 도 의병소에 지원하는 등 전공을 세웠다. 무장현김해김씨김축(金軸)은 아들, 형제, 조카 등 근친을 합한 25명과 가동과 마을 사람들을 창의하여 진주 혈전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우고 모두 순절하였다.

채홍국(蔡弘國)흥덕에서 창의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채홍국은 동년 9월 창의를 부르짖으니, 이에 호응한 90여명의 의사들이 흥덕현 북면의 남당에 모여 삽혈동맹하여 왜군과 싸웠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부안의 호벌치에서 적을 맞아 싸웠으나 채홍국과 그의 아들 그리고 300여 의병들이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오희길(吳希吉)은 후릉참봉(厚陵參奉)을 거쳐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에 임명되었는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을 당하자 태조의 영정과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정읍의 내장산(內藏山)에 옮겨 보관하였다.

2. 정묘·병자호란과 의병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김덕우(金德宇)는 의병과 의곡을 모아 무장 동백정에서 취합하여 배로 의곡을 보내는 한편 의병은 편제를 지어 북상하였다. 그러나 강화가 성립되어서 실전에 참여하지 못한 채 귀향하였다. 『정묘거의록(丁卯擧義錄)』에 보이는 고창 지역의 의병은 다음과 같다. 고창의 찰방 유철견, 통덕랑 김여성, 유학 안진·서일남, 무장의 정랑 오익창, 증참의 강시언, 흥덕의 봉사 이기문·이원남, 유학 황이후, 주부 송정렴, 군자정 송정속, 현감 정호례 등이 그들이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여산에 모의청이 설치되었다. 고창에서도 도유사와 유사를 정하여 군량, 무기, 전마 등을 모아 모의청으로 보내는 한편 의병들이 의병장 정홍명을 따라 북상하였다. 의병들은 청주에서 적병을 만나 무찌르고 과천까지 진격하였으나 왕이 삼전도에서 굴욕적으로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탄식하며 귀향하였다. 『호남병자창의록(湖南丙子倡義錄)』에 보이는 고창 지방의 의병에 가담한 선비들의 명단은 고창의 도유사 유동휘·유철견·박기호·조첨·유여해·유지태, 무장의 도유사 강시언·유용룡·김공립, 흥덕의 도유사 정호례·이창문 등이다,

3. 동학 농민 혁명과 의병전쟁

최근 동학 농민 혁명의 핵심 인물인 전봉준무장장사산 남쪽 당촌에서 태어났다는 새로운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전봉준은 여기서 태인을 거쳐 고부의 이평으로 이사하여 동학 농민 혁명을 일으켰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무장에는 동학의 남접이 있었고, 그곳의 접주는 손화중이었다. 전봉준손화중, 김개남과 함께 1894년 3월에 무장포고문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동학 농민 혁명의 시작이다.

의병전쟁은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에 저항한 것을 말한다. 고창의 초기 의병은 최익현의 의진에서 고석진(高錫鎭)정시해(鄭時海)가 활동하였고, 또 1907년 정미 의병전쟁 이후 당시 일본군이나 일본 경찰 등에 체포되어 일본 법정에서 형을 받은 고창 출신 의병 활동자는 강대영, 김공, 김대옥, 김동환, 김보배, 김상묵, 김도돌, 김화숙, 김응구, 박도경, 오치규, 이용태, 최영만, 하천일, 홍익선 등 40여 명이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