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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희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769
한자 吳希吉
영어음역 O Huigil
이칭/별칭 길지(吉之),도암(韜庵)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전라북도 고창군
성별
생년 1556년연표보기
몰년 1624년연표보기
본관 나주
대표관직 태인현감

[정의]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길지(吉之), 호는 도암(韜庵). 증조할아버지는 오세훈(吳世勳)이고, 할아버지는 오원(吳謜)이다. 아버지는 공주판관을 지낸 오언기(吳彦麒)이다.

[활동사항]

오희길(吳希吉)은 1566년(명종 21)부터 서당에서 글을 배웠는데, 총명하였고, 서책과 문방구를 좋아하니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내력이 있었다. 1571년(선조 4) 기효관(奇孝寬)의 딸과 혼인했고, 1573년(선조 6) 정월에 절에 들어가 글을 읽었는데, 부친 오언기가 시간을 아껴 글을 읽으라는 훈서를 보냈다.

1575년(선조 8) 부친상을 당하자 벽용(擗踊)[어버이의 상사(喪事)에 상제가 슬피 울며 가슴을 두드리고 몸부림을 침]하며 예법대로 장사지내고 3년 동안 시묘를 하였다. 1577년(선조 10) 처당숙이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제자인 금강(錦江) 기효간(奇孝諫)의 문하에서 『소학(小學)』을 공부하고, 변성온(卞成溫)·정운룡(鄭雲龍) 등과 도의로 교유하였다. 24세 때인 1579년(선조 12) 집터가 향교를 짓는 데 좋은 자리라 하여 팔기를 종용받자 그냥 내주고 순창의 고례촌(古禮村)[현 순창군 금과면 고례리]으로 이사하였다.

1582년(선조 15) 정여립(鄭汝立)을 만났고, 그 뒤 여러 차례 서신을 교환하였다. 1586년(선조 19) 정여립이 수찬(修撰)이 되어 율곡(栗谷) 이이(李珥)우계(牛溪) 성혼(成渾)을 배척하는 소를 올리자, 그의 인간성이 좋지 않다고 여겨 절교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의 모역 사건이 일어나자 정여립과 아는 사이라고 구금되었으나, 다음 해 절교 편지가 나와 선조가 그것을 보고 방면하여 귀가하였다. 그 해 6월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제수되고, 성혼을 만났다.

1591년(선조 24)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이 되고,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태조의 영정과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그리고 여러 사서와 제기 등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겼다. 1593년 조정의 명령으로 태조의 영정을 아산현에 옮기고, 『조선왕조실록』과 사서를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1596년(선조 29) 태조의 영정과 『조선왕조실록』, 제기 등을 강화도로 옮겼다가 이듬해 묘향산으로 옮겼다.

1604년(선조 37) 11월에 시폐를 상소하자 왕이 가납하고 호성선무이등훈(扈聖宣武二等勳)에 녹선하였다. 그 해 12월 모친상을 당하여 예제로 장사하고 3년의 시묘를 거행했다. 1610년(광해 2) 만언상소(萬言上疎)를 올리고, 다음해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를 만나 교유하였다. 그 해 4월 평릉도찰방(平陵道察訪)을 제수 받았고, 1613년(광해 5) 9월에 동부주부(東部主簿)를 제수 받고, 12월에는 사헌부감찰을 제수 받았다.

1614년(광해 6) 11월 태조의 영정을 경기전에 봉환하고 제사를 올릴 때 수헌관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정월 태인현감을 제수 받았으나, 6월에 무고로 체직되어 상경하였다. 1618년(광해 10) 7월 위성원종공신일등(衛聖原從功臣一等)에 참록되었고, 다음해 8월 허균의 무고로 거제도에 귀양을 갔다. 1620년(광해 12) 유배지에서 『도동연원록(道東淵源錄)』을 수찬하고, 다음해 『명대의편(明大義篇)』·『천명도설(天命圖說)』·『안산지(岸山誌)』·『백운지(白雲誌)』 등을 지었다. 1625년(인조 3) 유배지에서 향년 70세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사상]

오희길은 풍채가 매우 풍채가 좋고 의기가 당당하였고, 품성이 온화하였으며, 겉으로는 간소한 듯했으나 중심은 엄정하고 세밀하였다. 젊어서부터 경전과 사서, 성리서 등을 두루 섭렵했으며, 문장에 능했다. 평상시에는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도를 다하여 부모를 섬기고, 상사와 제사는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거행하였다.

윤근수·변성온과 같은 당대의 명유(名儒)들과 교유하였고, 학문의 연원은 김인후와 성혼을 본받아 독학 정취하여 위학(僞學)의 허물이 없었다. 원대한 기상과 고매한 뜻을 간직하여 유종(儒宗)을 존중하고 『도동연원록』을 저술했는데, 기자(箕子)를 맨 앞에 내세우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야은(冶隱) 길재(吉再), 그리고 조선의 제현과 간혹 신라·고려의 명신들을 채록하였다. 또 『천명도설』과 『명대의편』 등에서는 사람의 의리를 논하면서 이이성혼의 도학과 덕업을 지지하고 찬양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경기전참봉이었던 그는 신속히 태조의 영정과 『조선왕조실록』 등의 사서를 정읍 내장산에 옮겨 보관하였으니, 관리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지성으로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도암선생문집(韜庵先生文集)』 3권 1책이 있다.

[묘소]

묘소는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고례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742년(영조 18) 고창 월계사(月溪祠)에 향사되었으며, 1960년 아산면 반암리금암사(琴巖祠)에 다시 향사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3.11 [활동사항]수정 기효간과의 관계를 처종조에서 처당숙으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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