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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465
한자 丁卯胡亂
영어음역 Jeongmyo Horan
영어의미역 Manchu Invasions of 1627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주명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병 항쟁
발생(시작)연도/일시 1627년 1월 13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627년 3월 3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전라북도 고창군
관련인물/단체 김장생|김덕우|유철견|김여성|안진|서일남|오익창|강시언|이기문|이원남|황이후|송정렴|송정속|정호례

[정의]

1627년 후금이 침입해 일어난 전쟁.

[역사적 배경]

만주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은 조선과 명나라가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피폐해진 틈을 타 건주위(建州衛)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를 추대해 여러 부족을 통합, 1616년(광해군 8) 후금을 세우고 비옥한 남만주의 농토를 탐내어 명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명나라는 양호(楊鎬)를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삼아 10만 대군으로 후금 토벌에 나서는 한편, 조선에 대해서도 출병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조선에서는 명나라를 숭상하는 경향이 고조되었지만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명나라의 쇠퇴와 후금의 발흥이라는 정세 변화를 주시하면서 신중한 중립 외교 정책을 펴나갔다.

광해군강홍립(姜弘立)에게 1만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명군을 돕게 하면서도 형세를 판단하여 향배(向背)를 달리할 것을 비밀히 지시하였다. 명군이 사르후 전투[薩爾滸戰鬪]에서 대패한 뒤 계속 수세에 몰리자, 강홍립은 후금과 휴전하고 출병이 불가피한 상황을 해명하였다.

한편 조선에서는 인조반정 뒤 서인을 중심으로 친명 배금 정책을 수행하였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그 잔당이 후금과 내통하게 되었다. 이에 즉위 전부터 조선에 대한 화친 방침에 반대하여 주전론을 주장해 왔던 청나라 태종은 더욱 침략의 뜻을 굳혀 1627년 1월 아민(阿敏)에게 3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하였다.

[경과]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하거나 군량을 조달하는 등 분전하였다. 고창에서도 다투어 의병을 일으켜 후금군에 저항하였다. 김장생(金長生)이 충청도와 전라도의 호소사가 되어 막부를 세워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에 김덕우(金德宇)는 의병과 군량미를 모아 무장현 동백정에서 취합한 뒤 배로 군량미를 보내는 한편, 의병의 편제를 지어 북상하였다. 그러나 강화가 성립되어서 실전에 참여하지 못한 채 귀향하였다. 고창 지역에서는 고창현에서 유철견·김여성·안진·서일남, 무장현에서 오익창·강시언이며 흥덕현에서 이기문·이원남·황이후·송정렴·송정속·정호례 등이 참가하였다.

[결과]

조선과 후금군은 전쟁에 피로감을 갖게 되었다. 후금군은 평산 이남으로 더 이상 진출하지 않은 채 곧 철병하여 양국은 형제의 나라로 일컬으며 화약을 맺되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는다는 등의 조건으로 3월 3일 화의를 맺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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