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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홍국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755
한자 蔡弘國
영어음역 Chae Hongguk
이칭/별칭 광보(光輔),야수(野叟)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재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병장
출신지 전라북도 부안군
성별
본관 평강
대표관직 병조판서

[정의]

조선 후기 고창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가계]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광보(光輔), 호는 야수(野叟). 고려 시대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경평공(景平公) 채송년(蔡松年)의 후손으로, 예조판서를 역임한 채충경(蔡忠敬)의 현손(玄孫)이다. 아버지는 채치의(蔡致義)이다.

[활동사항]

채홍국(蔡弘國)은 1534년(중종 29) 전라북도 부안에서 태어나 장성한 후에 흥덕 남당촌으로 이주했다. 천성이 너그럽고 강직했으며 정성을 다해 어버이를 섬기니 고을에서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의 대가(大駕)가 용만(龍灣)으로 피난을 하자, 채홍국은 김천일(金千鎰)과 고경명(高敬命)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금산으로 갔다. 이후 고경명이 패전하자 흩어진 군사들을 다시 모아 끝까지 싸울 것을 다짐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20여 명의 가동(家僮)과 세 아들 채명달(蔡命達)·채경달(蔡慶達)·채영달(蔡英達)을 거느리고 군량미 13석, 병철(兵鐵) 115근을 가지고, 채우령(蔡禹齡)을 비롯한 종족 30여 명 및 마을 사람 60여 명 등과 함께 흥덕 남당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적과 싸울 것을 맹세하며 각자 피를 나누어 마시는 이른바 ‘삽혈동맹(歃血同盟)’을 맺고 의려장(義旅將)이 되었다. 이에 본관 수령 나척(羅惕)이 이들에게 군량을 조달해 주었으며, 수원에 있던 도원수 권율(權慄)도 그에게 글을 보내 격려하였다.

왜적이 순천을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채홍국은 급히 의병을 거느리고 순천 석보(石堡)에 이르러 적을 대파하여 적병 수십 명을 참살(斬殺)했다. 당시 사람들이 격전지였던 이 고개를 둔월치(屯越峙)라 불렀다. 순찰사가 이 사실을 조정에 알리자 선조가 특별히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고 다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로 승격시켰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그는 또다시 동지들에게 격문을 보내 뜻을 같이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전일에 숙맹(宿盟)을 했던 92명의 동지 외에도 30명이 합세했고, 의승(義僧) 5명도 가담했으며, 멀리 영암과 해남 등지에서도 달려와 가세했다. 그리하여 부안 호벌치(胡伐峙)에서 치열한 전투를 하여 누차 승리를 거두었으나 적들이 개미떼같이 달려들자, 이른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활쏘기를 계속했다. 이윽고 화살이 다 떨어졌는데 적병이 단검을 가지고 돌진해 오자, 채홍국은 맨손으로 대적하여 적병을 뒤에서 부둥켜안았으나 적의 칼날이 그의 가슴에 꽂혔다. 아들 채경달이 이 위급한 사정을 보고 달려와 지원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결국 채명달, 채경달, 채영달까지 모두 전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지사(知事) 유발(柳潑)이 행장(行狀)을 짓고, 판관(判官) 정범조(丁範祖)가 비문을 지었다. 1872년(고종 9) 병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사제(賜祭)하고 복호(復戶)[충신·효자·열부 등에게 노역과 전세(田稅) 이외의 잡부금을 면제하던 일]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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