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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546
한자 城郭
영어음역 Seokgwak
영어의미역 Castle
이칭/별칭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조선/조선
집필자 강원종

[정의]

전통시대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 적의 습격에 대비하여 흙이나 돌로 구축한 방어 시설.

[개설]

성곽이란 성(城)과 곽(郭)의 합성어이다. 성은 내성을 말하고 곽은 성의 주위를 에워싼 나성의 형태로 우리나라는 내성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공간을 성곽으로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전적 의미로 성곽은 군사적·행정적인 집단이 공동 목적을 갖고 거주 주체의 일정한 공동 활동 공간을 확보하고, 그 구조물이 연결성을 갖는 전통 건조물이다. 성벽은 거주 주체인 요원의 수용 공간을 보유하여 방어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성곽의 출현은 고대 국가의 출현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고대 국가 초기에는 목책, 도랑[外湟]과 같은 방어 시설물을 설치하였으나, 3세기 이후 고대 국가의 영토 확장 쟁탈전이 시작되면서 석성의 축조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성곽의 기능은 지역 및 국가 방어 등 각종의 군사 방어 목적에 따라, 또는 도성·읍성 등과 같은 행정적인 기능에 따라 구분된다.

전반적으로 우리나라의 고대 성곽은 산성이 대부분이고 석성이 주류를 차지한다. 고대 시대에 이어 획기적인 성곽의 축조가 활발한 시기는 고려 말~조선 초이다. 이 시기는 왜구의 빈번한 침입으로 피폐해진 연해 지역에 거주민의 보호와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겸한 읍성의 축조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따라서 여기서는 삼국 시대에 고창 지역으로 진출한 백제의 성곽과 고려 말~조선 초에 연해 지역을 중심으로 축성된 읍성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삼국 시대 백제 성곽]

고창 지역에는 지금까지 알려진 성곽이 13개소에 이른다. 읍성으로 분류되고 있는 고창읍성모양성무장읍성, 흥덕읍성은 고려 말~조선 초에 초축 내지 개축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지만 그 나머지의 성곽은 초축 시기가 확연하지 않다. 초축 연대가 불분명한 경우에는 문헌 자료나 지리적인 입지, 축조 방식 및 지표 수습 유물 등으로 미루어 보아 삼국 시대 이전의 성곽으로 보는 경향이 대부분이다. 더욱이 고창 지역은 백제의 고지(古地)인 연유로 당시의 치소지나 주변의 피난성인 산성들은 이 시기에 해당될 확률이 높다.

삼국 시대 백제의 영역에 속한 현재의 고창 지역에는 상칠현(上漆縣),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 송미지현(松彌知縣), 상로현(上老縣) 등 4개의 현이 있었다. 상칠현은 지금의 흥덕으로 백제 고사부리군(古沙夫里郡)[현 고부]의 영현이었다가 신라 경덕왕 때 상질(尙質)로 개명되었다. 모량부리현은 지금의 고창읍 일원, 송미지현은 고창 성송면 일원, 상로현은 고창 공음면·상하면 일원으로 백제 때 무시이군(武尸伊郡)[현 영광]의 영현이었다가 신라 경덕왕 때 모량부리현은 고창현(高敞縣), 송미지현은 무송현(茂松縣), 상로현은 장사현(長沙縣)으로 바뀌어 무령군(武靈郡)의 영현이 되었다.

1. 상칠현 치소

흥덕에 있는 상칠현의 치소지는 어디인가. 그 치소는 흥덕면 오호리(五湖里) 오대동(五台洞)에 자리하고 있는 오태리(吳泰里) 토성으로 보고 있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서는 ‘오태리 고성 재서3리(吳泰里 古城 在西三里)’라 하여 흥덕읍성 바로 서쪽 지역에 토성이 있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고성’은 옛 백제 지역에 있었던 성(城)을 뜻하는 바, 그 시기를 백제로 볼 수 있다.

최근 조사된 흥덕농공단지 발굴 조사에서 보고된 백제 횡혈식 석실분은 현 오태마을 남쪽 구릉의 남사면에, 장축은 남북 방향이며, 우편제의 연도가 있는 석실분이 6기가 있다. 석실의 석재는 장방형의 할석을 이용하였고, 직구광견호·병형토기·개배·청동인장·금제이식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청동인장은 지방 수장층, 즉 ‘장군’이 사용하였던 인장으로 당시 지방 통치제도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인근의 석교리에서는 원삼국 시대의 주거지를 비롯하여 주구묘[주구(周溝)라고 하는 도랑을 둘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널무덤[토광묘] 등도 발견되어 삼한 시대 이래로 오태리 고성은 삼국 시대까지 이어져 경영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2. 모량부리현 치소

모량부리현의 치소는 어디일까? 고창 지역의 삼국 시대의 치소성은 토성일 가능성이 크다. 상칠현의 치소성으로 비정되는 오태리 고성, 그리고 송미지현 고성지로 알려진 무송고현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고창읍 일원에는 토성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고창읍에서 서쪽으로 4.5㎞ 떨어진 고수면 예지리 태봉산[110.8m]에 자리하고 있는 예지리 성지가 있다. 예지리 성지에 대한 문헌 기록이나 학술 조사 자료는 보고된 바 없다. 다만 태봉의 정상부 부근을 따라 테뫼식의 토성이 둘러져[둘레 327m 추정] 있으며, 지표 수습 유물 중 백제 시대의 기와편과 토기편이 수습되고 있다.

한편 태봉산의 남사면 높이 73m 지점에서는 백제 사비기의 중앙묘제인 판석조 석실분이 조사된 바 있다. 이 석실분은 6세기 말~7세기 초로 추정되며 익산 쌍릉, 성남리 고분군, 완주 둔산리 고분처럼 백제 중앙의 정형화된 묘제로 규명되고 있다. 따라서 태봉산에 자리하고 있는 예지리 성지 또한 백제와 깊은 관련이 있는 토성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예지리 성지에서 북쪽으로 2.5㎞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서산산성도 백제 시대로 추정되고 있다. 서산산성은 테뫼식의 석성으로 남사면에 해당하는 상갑리죽림리에서도 백제의 횡혈식 석실분이 조사되어 이 고분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3. 송미지현 치소

송미지현은 신라 경덕왕무송현으로 개칭되어 조선 시대 송사현과 합쳐져 무장현으로 옮길 때까지 치소로 경영된 무송고현 성지에 해당된다. 무송고현 성지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문헌비고』 등의 문헌에서 토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서도 ‘토축 약 360간[636m]’으로 밝히고 있다. 하지만 무송고현 성지는 산 정상부를 따라 축성된 테뫼식이 아닌 삼태봉 산 아래와 평지를 감아 도는 평산식의 토성이라 할 수 있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성지조(城址條)에서는 ‘하고리성황당토축주위약350간무송대성황지(下古里城隍堂土築周圍約三百五拾間茂松代城隍址)’라 하여 성황당 주변에 토성이 있었음이 짐작된다. 현재 성황당을 비롯하여 토축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지만 ‘고현’, ‘남창’, ‘삼태’ 마을은 무송현의 성 내부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무송고현 성지에서 북동쪽으로 3.5㎞ 떨어진 대산면 성남리에는 성남리 산성이 자리하고 있는데, 일명 ‘토성산[95.3m]’으로 불리는 토성이다.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하권에 의하면 무송현의 철폐 당시 폐성되었으며,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하였다. 그리고 무송고현 성지에서 동남쪽으로 3㎞ 떨어진 고산성 역시 삼국 시대까지 올라 갈 수 있는 포곡식의 산성이다. 이 고산성은 교통의 지정학적인 요충지에 해당되는 곳으로 호남 정맥의 동서 지역의 통로를 관망하기에 유리하여 고대부터 중요시 여겨왔을 뿐만 아니라 규모면에서도 둘레가 5㎞ 정도로 커서 피난성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4. 상로현 치소

상로현은 신라 경덕왕장사현으로 개칭되었다. 장사고현성은 장사산[269.8m]의 정상부와 능선을 따라 축조된 석축성이다. 둘레는 약 1.5㎞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장사고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장사고현성은 935년(태조 18)에 축성되어 무장현으로 합치기 전까지 유지되었던 성이다. 따라서 백제 상로현의 치소지의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볼 수 있다.

장사고현성의 주위에는 2개소의 토성이 있다. 장사고현성에서 북쪽으로 4.5㎞ 떨어진 조지산에 자리하고 있는 왕촌리 성지와 동쪽으로 2㎞ 정도 떨어진 산성봉[해발 180m]에 성내리 성지가 있다. 왕촌리 성지는 해발 225.4m의 정상부에 둘레 360m 정도의 토성지로 비교적 지형이 높은 편이다. 하지만 성내리 성지는 지형이 그다지 높지 않고 테뫼식의 토석혼축성으로 둘레가 약 1㎞ 정도이다. 또한 성내리 성지는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서 장사현 시대의 성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미 오래 전에 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백제 상로현의 치소는 성내리 성지로 비정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고창 지역 내 삼국 시대의 성곽들은 백제 현의 치소성과 그 피난성으로 비정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행정적인 기능이 주가 되는 치소성은 토성이며, 그다지 지형이 높지 않고 수자원을 원활하게 조달할 수 있는 평지나 작은 계곡을 포함하여야 한다. 물론 규모도 클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를 뒷받침할 충분한 자료가 부족한 형편이라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조선 시대 읍성]

1. 고창읍성

고창 지역에는 조선 시대의 읍성인 고창읍성무장읍성이 잘 남아 있으며, 흥덕읍성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고창읍성은 백제 때 모량부리현에서 유래하여 ‘모양성’이라고 한다. 고창읍내리에 있는 사적 145호[1965년 4월 1일] 고창읍성은 해미읍성, 낙안읍성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읍성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 읍성은 문수산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린 지맥의 능선에 따라 평면상 원형에 가깝게 축조된 평산성으로, 성벽의 둘레는 1,680m, 높이는 3.6m이다.

이 읍성은 조선 시대 전기에 고창 지역의 통치와 왜구의 방어라는 두 가지 목적을 두고 만들어졌다. 그러나 읍성의 축성에 관한 기록은 없으며, 읍성에 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창현 성곽조에 나타난다. ‘읍성석축주삼천팔십척고십이척내유이지사천(邑城石築周三千八十尺高十二尺內有二池四泉)’이라고만 되어 있으며, 동헌과 관계되는 사항도 살필 수 없다. 다만 이 읍성의 축조 당시 구간별로 축성을 할당하였던 여러 가지의 명문이 성벽에 새겨져 있는데, 그 중 동문의 옹성벽에 ‘계유소축감동송지민(癸酉所築監董宋芝玟)’이라고 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고창읍성은 계유년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수정을 거쳐 탈고한 1484년(성종 17년) 이전으로 보인다.

다른 명문 중 고을 표석인 ‘무장시면(茂長始面)’에서 무장현은 1417년(태종 17) 무송현장사현이 합쳐져서 그 중간 지점에 읍성을 축성하였기에, 이를 고려한다면 고창읍성은 1417년에서 1484년 사이의 계유년인 1453년(단종 1)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헌의 건물도 이 무렵을 전후해서 세워졌을 것으로 본다. 현재 초기 동헌의 위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6세기 중엽에 세워져 16세기 후반에 화재로 소진된 것으로 1592년(선조 25)에 현감 정운룡(鄭雲龍)이 청절당(淸節堂)이라는 동헌을 다시 세웠고, 화재로 소실된 후 1670년(현종 11)에 현감 송국사(宋國士)가 다른 지역에 동헌인 평근당(平近堂)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읍성의 성곽 시설로는 동문[등양루], 북문[공북루], 서문[진서루] 등 누각형의 성문이 있고 반원형의 옹성이 성문 밖으로 둘러져 있다. 치성은 방형으로 성벽에 돌출된 성벽으로 6개소가 있다. 성 내부에는 동헌과 객사 등 26동의 관아 건물과 4개소의 샘, 2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발굴 조사를 통해 동헌, 내아, 객사, 작청, 풍화루 등 14개동의 건물지가 복원되어 있다.

2. 무장읍성

무장읍성무장면 성내리에 위치하며 사적 제346호[1991년 2월 2일]로 지정되었다. 무장읍성은 1417년(태종 17) 병마사 김저래(金著來)가 무송현장사현을 통합하여 현재의 위치에 읍성을 축조하였다. 읍성의 축조는 조선 초기 왜구의 노략질과 침입을 막기 위한 것으로 무송과 장사 사이의 중간 지점인 무장에 터전을 잡아 진성을 쌓은 후 무송과 장사의 첫 글자를 따서 무장으로 하였다.

무장읍성은 해발 60m의 사두봉을 중심으로 구릉성 야산을 장방형으로 에워싸고 있는 평지 읍성이다. 그리고 무장진을 두어 군사적인 기능을 강화했던 특수성이 있다.

체성은 내벽과 외벽을 모두 돌로 쌓은 협축식으로 그 둘레는 1,140m이며, 동벽 228m, 서벽 258m, 북벽 314m, 남벽 340m 정도이다.

성곽 시설로는 남문과 동문 등 2개소의 성문이 있으며, 바깥쪽에는 반원형의 편문식 옹성을 설치하였다. 남문인 진무루(鎭茂樓)는 1612년(광해군 4)에 개건된 이래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다고 한다. 치성은 문헌에 전하는 기록은 없지만 2005년 조사에서 남벽에 반원형 치성 일부가 조사되었다. 해자(垓字)는 『문종실록(文宗實錄)』에 따르면 둘레 약 650m로 거의 성벽의 두 배 규모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자는 서벽과 남벽, 북벽에서 일부 조사되었다.

성 내부에는 동헌과 객사 등이 있다. 현감이 집무하던 곳으로 1973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되었다. 동헌은 무장읍성 축성 당시 창건되었다고 하나 1635년(인조 13)에 축조되어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개건되었다. 1983년 중창을 한 후 전면에 ‘취백당(翠白堂)’이란 현판을 걸어 두었다. 규모는 정면 6칸, 측면 4칸으로 네 귀에 추녀를 설치하고 겹처마 형식을 하여 건물 전체가 장중하다.

객사는 1973년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다. 이 객사는 1581년(선조 14)에 건립되었다고 전하는데, 1988년에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649년(인조 27), 1736년(영조 12)에 중수한 것으로 밝혀졌다. 객사의 규모는 정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홑처마 맞배지붕이며, ‘송사지관(松沙之館)’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좌우 익헌은 4칸이며 팔작지붕이다. 건물은 높이 80㎝의 축대 위에 세워져 있으며, 가운데에 계단과 월대를 두었다. 이외에도 성황당지(城隍堂址), 책실(冊室), 작청(作廳), 현사(縣舍). 읍취루(揖翠樓), 문루(門樓), 관노청(官奴廳) 등의 여러 건물지가 추정되고 있다.

3. 흥덕읍성

흥덕읍성흥덕면 흥덕리에 자리한다. 흥덕현은 본래 백제 상칠현이었다. 상칠현은 신라 경덕왕이 상질(尙質)로 고치어 고부군의 속현이었다. 후에 장덕(章德)으로 고쳤으나 충선왕이 1308년 즉위하자 창덕(昌德)으로 고치었고, 다시 1388년(고려 창왕 즉위)에는 창왕의 이름이 같기 때문에 흥덕으로 고치었다. 이 읍성은 축성 기록과 관련된 기록은 없으나, 1450년(문종 즉위) 전라도 지역의 읍성 정비를 위한 차원에서 실태 파악을 한 결과 흥덕읍성은 개축 대상으로 분류됨에 따라 이전에 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흥덕현의 읍성은 석성이며 규모는 295보(步)”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1477년(성종 8)에 완공을 한다. 추측컨대 조선 시대 전기에 개축 대상으로 분류된 후 새로이 읍성을 축조한 시기에 지금의 배풍산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여러 문헌 자료에서는 “석축, 둘레는 3,001척[약 909m], 높이는 9척[약 2.7m]”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서는 ‘읍성은 토성지’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읍성의 축성 방식은 내탁식으로 산 경사면을 깎아 외면에 성돌을 쌓고 뒤채움을 하면서 상면을 토루로 이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대동지지』권 11에서 “흥덕읍성은 배풍치 위에 있으며, 임진왜란 후 치소가 성 밖으로 이주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지금의 객사가 있는 성 밖으로 동헌과 함께 옮겨졌다.

배풍산은 높이 109.2m로 7부 능선을 따라 토루가 둘러져 있는 테뫼식의 산성이다. 평면 형태는 말각 장방형이며, 성의 둘레는 약 950m이다. 성벽 상단부의 토루는 전체적으로 잘 남아 있으며, 그 폭은 약 7m 정도이다. 성문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나 지형과 토루의 연결 상태를 보면 서문지와 북문지가 관찰된다. 성안에는 우물이 3개소 있었다고 하나 1개소만 확인되고 있다.

[의의]

고창 지역에서 읍성의 축조는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의 역사적인 상황에서 살펴볼 수 있다. 고창의 서부 지역은 서해와 맞닿는 곳으로써,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여 백성들의 인명과 막대한 재산을 약탈당하게 됨에 따라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연해 지역을 중심으로 읍성의 축조가 활발해졌다. 더불어 군사적인 거점 시설을 두었는데 흥덕현에는 흥덕진을, 무장현에는 무장진을 배치하여 왜구를 방어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조선 초기 산성 입보 체제에서 읍성 입보 체제로 전환하게 되는데, 고읍성들은 대개 산 정상부에 있는 산성이기 때문에 피난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그런 연유로 연안 지역의 지방 통치체를 병합하여 방어 체계를 강화하는 한편, 퇴축 및 개축 대상을 구별하여 읍성의 방어 시설을 만만히 보강하는 차원에서 성벽을 석축으로 개축하고 여러 성곽 시설을 두루 갖추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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