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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480
한자 英學黨
영어음역 Yeonghakdang
영어의미역 Yeonghakdang Organization
이칭/별칭 영학회,영학계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신순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농민운동
설립연도/일시 1898년연표보기
해체연도/일시 1899년연표보기
설립자 동학농민군 잔여 세력

[정의]

1898년부터 1899년까지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 지역에서 활동했던 농민 항쟁 조직.

[개설]

영학당은 1898년 12월 28일~30일까지 진행된 흥덕농민봉기, 1899년 3월에 일어난 전주농민봉기, 1899년 5월 전주·고부·흥덕·태인·정읍·무장 등지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을 주도하였다.

갑오농민전쟁기의 집강소 조직과 을미의병의 실질적인 전투력이었던 포군 조직이 결합된 조직으로 주도 세력은 농민과 갑오농민전쟁·을미의병의 잔여 세력이었다. 항쟁 당시 조직 체계는 서기·성찰·윤량관·접주·포사·포사장 등으로 편성되었다. 1898년 당시 주요 지도자들은 이화삼(李化三)·정익서(鄭益瑞)·김문행(金文行)·최익서(崔益瑞) 등이었으며 이화삼은 1898년 10월 만민 공동회에 참가하여 대중 앞에서 직접 연설도 하였다.

[설립목적]

동학 농민 혁명의 맥을 이어 봉건 체제의 각종 수탈에 항거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활동사항]

영학당 가운데 가장 먼저 봉기한 조직은 흥덕영학당이었다. 흥덕군수의 탐학으로 농민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1898년 12월 28일 흥덕 영학당이화삼송민수(宋敏秀) 등과 농민 봉기를 사전에 모의하고 만민 공동회의 경험을 원용하여 농민들의 의사에 따라 마을 행정을 바로잡을 계획을 세웠다.

같은 달 29일 새벽 이화삼송민수가 각각 300여 명의 농민을 이끌고 흥덕관청으로 쳐들어가 삼반관속과 군중을 모아 놓고 수령의 탐학을 재판하는 등 고을 행정을 바로잡았다. 그러나 다음 날인 30일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면서 이화삼을 비롯한 영학당의 주요 지도자들이 체포·구금됨으로써 제1차 영학당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제1차 운동의 실패 후 농민들이 구속 인사의 석방을 요구했으나,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이화삼의 종신형을 언도하였다. 이에 1899년 5월 4일 농민들은 정부의 강력한 처벌과 정권의 무능을 비판하며 흥덕군에서 호남공동대회(湖南共同大會)를 열어 재차 봉기할 뜻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 27일 밤 화승총·칼·몽둥이·죽창 등으로 무장하고 고부관청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인근 지역에 척왜양(斥倭洋)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위해 봉기했다는 자신들의 투쟁 목적을 천명하였다.

이어 29일에 영학당흥덕·무장을 차례로 점령하고 31일에는 고창에서 관군과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비가 내려 화승총을 주 무기로 하는 농민군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양총을 주 무기로 하는 관군을 당할 수 없어 결국 패하기 시작했으며 이튿날에는 완전히 진압되었다. 영학당 운동은 농민 전쟁·의병 투쟁·만민 공동회 운동의 세 흐름이 복합적으로 합류되어 나타났던 반외세·반봉건 운동이었다.

[의의와 평가]

영학당의 주체 세력은 농민과 농민 전쟁의 잔여 세력으로서 봉건 체제의 각종 수탈에 대한 항거와 반외세라는 기치를 분명히 하였다. 이는 흥덕농민봉기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5월의 봉기[전주·고부·흥덕·태인·정읍·무장 등지에서의 농민 봉기]를 지휘한 최익서가 “우리 당은 모두 갑오년의 여괴(餘魁)·누도(漏徒)로서 이번에 봉기하였다.”고 말한 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또한 그들이 내건 ‘보국안민’과 ‘척왜양’도 동학의 기치와 같은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흥덕농민봉기와 이후 발생한 최익서의 5월 봉기를 보도한 당시의 『황성신문』에서도 자연재해로 농민들의 빈궁이 가속화되고, 그 위에 가해진 지방관들의 탐학이 농민들의 봉기를 부추겼다고 평가하면서, 그와 같은 상황은 다른 지방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하였다. 곧 이들의 봉기는 1894년의 동학농민군 봉기를 계승한 농민들의 반봉건·반외세침략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영학당은 만민 공동회의 형식을 빌어 민중의 의견을 적극 수렴하는 민의 정치를 펼쳤다. 이는 전근대적인 봉건 체제의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전달 방식의 정치에서 벗어나 민중의 여론을 충분히 수렴하는 근대적인 정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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