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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859
한자 崔益瑞
영어음역 Choe Ikseo
이칭/별칭 석일(錫一),운일(雲一),일서(一西)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정성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정읍 농민 봉기 지도자
출신지 전라북도 정읍시 임암면 만화동
성별
생년 1858년연표보기
몰년 1918년연표보기
본관 초계

[정의]

개항기 고창 지역에서 활동한 정읍 농민 봉기 지도자.

[개설]

본관은 초계(草溪)이며, 이름은 석일(錫一)·운일(雲一)·일서(一西), 자는 익서(益瑞)이다. 1858년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임암면 만화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최영두(崔永斗)[1829~1899]도 동학 농민 혁명에 앞장섰다.

[활동사항]

최익서는 고부 마항리(馬項里)[현 정읍시 이평면]에서 예수교를 빙자하여 영학당을 조직한 뒤 고부·장성·흥덕(興德)·고창·영광·무장(茂長)·함평 등 7개 군(郡)의 수계장(首契長)이 되어 비밀리에 농민 재봉기를 추진하였다. 그는 벌양벌왜(伐洋伐倭)와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 아래 “우리는 갑오의 여당이니 앞으로 이웃 고을의 군기를 거두어 가지고 영암의 민란 장두(狀頭) 최옵바시와 상응하여 광주(光州)를 습격하고 이어서 전주감영에 입성한 뒤 장차 서울로 진격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최익서는 아버지 최영두와 김여중(金汝中)[부안 사람]·김문행(金文幸)[태인 사람], 송문여(宋文汝)[장성 사람] 등과 거사를 계획하고, 1898년 4월 18일[음력] 밤 고창에 사는 박정집(朴正執) 등 32명을 거느리고 고부관아를 습격하였다. 그러고는 양총(洋銃) 11개, 천보총(千步銃) 15개, 조총(鳥銃) 150개, 화약 2궤, 철환 1궤, 탄자 50개를 탈취하여 이미 집결해 있는 300여 명에게 무장을 갖추게 하고 19일 밤 흥덕으로 향했다.

최익서가 이끄는 농민군은 흥덕에서 20일 아침식사를 하고 나서 사포(沙浦) 유 첨사 집에서 1백 냥을 거두고 21일 밤 횃불을 켜들고 무장관아를 습격하였다. 그리고 22일에 고창으로 향했다. 이때 고창군에서는 광주에 있는 관찰사에게 급히 급보를 보내어 응원을 요청하고 민군 1백여 명을 모집하여 성을 지키게 하였다.

이윽고 농민군은 고창 수성군(守城軍)과 접전을 벌였으나 때마침 비가 내려 패하고 말았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화승총은 비가 내리는 데서는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영두가 이끄는 일부 농민군은 미처 고창에 이르기 전 10리 밖 증대점(曾大店)[일명 점대을, 현 고창군 아산면 봉덕리]에서 패보를 듣고 정읍으로 돌아왔다.

고창 싸움에서 패한 농민군은 난산 장터[일명 알뫼 장터, 현 고창군 부안면]로 후퇴했다가 다음 23일 관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역시 패했다. 이때 200여 명에 이르는 농민군이 관군에 잡혔는데, 최영두는 이때 관군에게 잡혀 전주감옥에서 죽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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