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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소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1839
한자 尹紹宗
영어음역 Yun Sojong
이칭/별칭 헌숙(憲叔),동정(桐亭)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권순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전라북도 고창군
성별
생년 1345년연표보기
몰년 1393년연표보기
본관 무송
대표관직 병조전서

[정의]

고려 말 조선 초 고창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헌숙(憲叔), 호는 동정(桐亭). 고조할아버지는 무송현 호장의 아들로 자수성가하여 충렬왕 때 정헌대부 국학대사성 문한사학(正獻大夫 國學大司成 文翰司學)을 지낸 윤해(尹諧)이며, 할아버지는 문정공(文貞公) 윤택(尹澤)으로 공민왕 때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지냈다. 아버지는 『고려사(高麗史)』 효우전에 입전된 윤구생(尹龜生)이며, 동생은 조선 태종 때 사간원 좌사간을 지낸 윤회종(尹會宗)이고, 아들은 세종 때 대제학을 지낸 윤회(尹淮)이다.

[활동사항]

윤소종(尹紹宗)은 총명하고 민첩하며 학문을 좋아하여 나이 20세가 되기 전에 시문(詩文)이 이미 노성(老成)하여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이 보고 기이한 재주라 칭찬하였다. 1360년(공민왕 9) 뛰어난 성적으로 과거에 장원 급제해 사관(史官)이 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당시 아첨으로 임금의 총애를 얻던 김흥경(金興慶)과 환관 김사행(金師幸)이 나라를 병들게 하고 백성을 해롭게 하였다. 이에 윤소종이 상소를 올려 이들을 제거하려 하였는데 관련자들이 알고는 휴가 중이던 그를 직무 태만으로 규탄, 파면시켰다.

우왕 초 전교시승(典校寺丞)으로 임명되고, 성균사예(成均司藝), 전의부령(典儀副令), 예문응교(藝文應敎) 등을 역임하였다. 1388년(우왕 14)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回軍)하자 군영으로 찾아가 『곽광전(霍光傳)』을 바치니, 왕씨를 다시 세우라는 뜻이었다. 창왕이 즉위하자 전교령(典校令)으로 승진하고, 곧 우사의대부(右司儀大夫), 성균관대사성이 되어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죄를 극렬하게 논하였다.

이성계가 사전(私田)을 개혁하려 하자 거의 모든 조정 관리들이 반대하였으나 윤소종정도전(鄭道傳) 등과 더불어 힘써 청하여 이를 개혁하였다. 1389년 공양왕 즉위 후 좌상시(左常侍), 경연강독관(經筵講讀官)이 되었다. 승려 찬영(粲英)을 왕사(王師)로 삼으려는 데 대한 윤소종의 불가 상소가 왕의 비위를 건드려 예조전서로 옮겼다가 금주(錦州)로 귀양 갔다. 1392년 태조가 즉위하자 다시 병조전서에 임명되고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등을 역임하였다. 1393년(태조 2) 나이 49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사림(士林)에서 애석하게 여겼다.

[학문과 사상]

윤소종은 강개(慷慨)하고 큰 뜻이 있어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풍속을 바르게 하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늘 임금에게 정치의 잘잘못을 진술하는 데 꺼리고 숨김이 없었다. 그러나 산업(産業)을 돌보지 않아, 집에서 자주 양식이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렀어도 개의치 않고, 경사(經史)를 널리 보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특히 성리학에 정통하였으며 이단(異端)을 배척하는 데 힘썼다.

[저술 및 작품]

저술한 시문(詩文)이 8권인데, 스스로 『동헌집(桐軒集)』이라 이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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