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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1838
한자 尹澤
영어음역 Yun Taek
이칭/별칭 중덕(仲德),율정(栗亭),문정(文貞)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권순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전라북도 고창군
성별
생년 1289년연표보기
몰년 1370년연표보기
본관 무송
대표관직 첨의찬성사

[정의]

고려 후기 고창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중덕(仲德), 호는 율정(栗亭). 증조할아버지는 무송현 호장 윤양비(尹良庇)이고, 할아버지는 충렬왕 때 정헌대부(正獻大夫) 국학대사성 문한사학(國學大司成 文翰司學)을 지낸 청백리 윤해(尹諧)이다. 아버지 윤수평(尹守平)은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어머니는 진례군부인(進禮郡夫人) 김씨이다. 아들은 고려 말 이미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실천한 윤구생(尹龜生)이며, 손자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유학자이자 문신인 윤소종(尹紹宗)이다.

[활동사항]

윤택(尹澤)은 세 살 때부터 글을 읽었는데 배운 것을 금방 외웠다. 좀 더 자라서는 과거에 장원 급제한 고모부 윤선좌(尹宣左)에게 글을 배웠는데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1317년(충숙왕 4) 진사시에 합격하고, 1320년(충숙왕 7) 과거에 1등으로 급제하였다. 경산부사록(京山府司錄)에 임명되자 농사를 감독하고, 학교를 수리하며, 백성들에게 조상의 제사를 권장하여 예절과 풍속이 흥하게 되었다.

서경판관 시절 어떤 사람이 윤택이 왕에게 공손치 못한 언동을 했다고 모함하자 왕이 “그는 충성스러운 사람이니 반드시 네가 허망한 소리를 하는 게로다”라고 할 만큼 왕의 신임이 두터웠다. 1338년(충숙왕 복위7) 우부대언에 임명되어 관리의 인사를 맡았으며 이듬해 우대언이 되고 과거 고시관이 되어 99명의 훌륭한 선비들을 뽑았다. 곧 왕이 병이 깊어지자 윤택에게 강릉대군[공민왕]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충혜왕을 거쳐 충목왕충정왕이 연이어 즉위하면서 윤택은 지방관으로 나가 있었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중앙으로 들어와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었다. 시무에 대한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개성윤(開城尹)으로 물러나 퇴직하였다. 그러나 왕은 윤택에게 경연에서 『서경(書經)』이나 『대학연의(大學衍義)』 등을 계속 강론하게 하고, 그는 또한 시정의 문제를 간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1361년(공민왕 10) 정당문학, 1363년(공민왕 12) 첨의찬성사를 더하였다. 이듬해 병으로 고향에 내려갔으며, 1370년(공민왕 19)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사상]

윤택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어 아버지의 얼굴도 알지 못하였으므로 시제(時祭)를 지내러 무덤에 올라가면 반드시 곡을 하며 몹시 슬퍼하였다. 책에서 부자의 정(情)을 적은 것을 보면 눈물을 흘리며 기가 막혀 말을 하지 못하였다. 또 항상 주머니 하나를 차고 있다가 특별하게 맛있는 것을 얻으면 반드시 가득 담아서 돌아가 대부인에게 드렸는데, 사람들이 비웃더라도 그치지 않았다.

연경(燕京)을 여행할 때 길에 금 백 냥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는 이를 지키면서 주인을 기다렸다. 그 주인이 울면서 사례하고 돌아갔으나 조금도 덕을 베푼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평생 베로 만든 이불과 해진 자리를 깔고 덮었고, 끼니를 간혹 거르기도 하였으나, 마음을 편안하게 지냈다. 봄가을로 좋은 계절이 되면 반드시 술자리를 베풀고 손님을 불렀으니, 본성에 맡겨 자적한 것이 이러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율정집(栗亭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부음을 듣자 임금이 몹시 슬퍼하였으며,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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