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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금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1814
한자 許錦波
영어음역 Heo Guempa
분야 역사/근현대,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이영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판소리 명창
출신지 전라북도 고창군
성별
생년 1866년연표보기
몰년 1949년연표보기

[정의]

일제 강점기 고창 출신의 판소리 명창.

[개설]

판소리에 관한 한 지금까지도 권위 있는 연구서이자 명창 열전으로 알려져 있는 정노식의 『조선창극사』, 박황의 『판소리 이백년사』 등에 허금파(許錦波)[1866~1949]는 진채선 이후 두 번째로 고창이 배출한 명창에 반열에 오른 여류 명창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논의에서 허금파신재효의 가르침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고창 출신이 아닐 것이라는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최동현 교수는 『진채선 생가 조사 및 검당마을 염정지 지표조사 결과 보고서』에서 허금파가 고창 출신이 아니며, 신재효 문하에서 지침을 받았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보고하였다. 일찍이 고창의 신씨 집안과 인연을 맺고 신재효의 판소리를 평생 연구한 강한영 박사의 증언과 여러 가지 정황을 토대로 한 논의에서 최동현 교수는 허금파 명창이 고창 출신이 아니라 고창으로 이주하여 고창에서 활동하다가 그곳에 뼈를 묻은 명창이라는 사실을 논의하고 있다. 허금파는 딸 외에도 아들 하나를 두었으며, 그 후손들이 고창에 살고 있다고 한다.

[활동사항]

허금파는 원각사 시절 창극 「춘향전」의 월매 역으로 인기를 얻었던 때 예술 활동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원각사 폐쇄 이후에는 활동을 접고 가정에 묻혀 살았다는 것이 공통적인 정론이다. 그 후 허금파에 관한 소식은 전하는 것이 별로 없다. 또한 그녀의 장기는 「춘향가」였고, 특히 ‘옥중가’ 대목을 출중하게 잘 불러서 청중을 울렸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그녀의 행적을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원각사 시절이며, 그 후 가정에 묻혀 살면서부터는 공식적인 활동은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의 행적이 드러나는 시점은 허금파가 고창에서 은방을 하였던 남편을 만나 고창에 정착하면서부터이다. 최동현 교수의 언급에 의하면, 강한영 박사가 젊었을 적 고창에서 허금파를 만났을 때 매우 늙고 추하게 변하였다고 한다. 경상도 말씨를 썼고 길가에서 담배를 물고 다니면서 늘 술에 취해 있었으며 함부로 욕설을 하기도 해서 사람들이 잘 접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강한영 박사는 허금파 명창이 원각사 시절 협률사 단원으로 다니다 남편을 만났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강한영 박사는 허금파 명창이 신재효의 제자일 가능성일 전혀 없다고 말하였다. 강한영 박사의 누이이자 신재효의 4세손 신형종의 부인 강한희 여사 또한 비슷한 증언을 하고 있다. 강한희 여사는 허금파를 경상도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으며 대단한 미인이었던 허금파의 딸 송월향이 고창에서 소리꾼으로 활동하였는데, 강한희 여사에게는 작은 아버지이고, 후에 고창면장을 역임한 신재효 증손자 신기준의 후실로 들어가 자식을 낳고 살았다고 증언한다.

덧붙여 허금파의 소리를 직접 들었는데, 옛날에 양조장이 있었던 ‘수북동 숲정이’라는 곳에서 풍류객들과 소리꾼들이 소리를 즐기며 놀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허금파의 묘소는 고창읍 월곡리 산108-1번지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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