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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산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1740
한자 禪雲山歌
영어음역 Seonunsanga
영어의미역 Seonunsa Temple Song
이칭/별칭 「선운산」,「선운산곡」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손앵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대 가요
작가 정역(征役)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
창작연도/발표연도 백제시대

[정의]

고창 선운산을 배경으로 한 작자 미상의 백제 시대 가요.

[개설]

「선운산가」는 실전(失傳)된 백제 가요의 하나로, 작자와 연대는 미상이다. 원사(原詞)도 한역사(漢譯詞)도 전해지지 않고, 제목과 유래만 『고려사(高麗史)』 악지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에 전해오고 있다. 장사(長沙)라는 지역에 사는 사람이 정역(征役)에 나갔는데 돌아올 기한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집에 돌아오지 않자, 그 아내가 선운산에 올라가 남편이 돌아올 방향을 바라보면서 못내 그립고 걱정스러운 심정을 읊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정역이라 함은 일정한 나이 이상이 되어 서울에 가서 일에 복역하는 것을 말한다. 부역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수난은 천한 백성이라면 으레 겪어야만 했고, 그래서 남편과 이별한 아내의 노래는 거듭 되풀이되었다. 백제 가요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내용]

작자 미상의 백제 실전 가요인지라 원래 노랫말의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할 길을 없으나 『고려사』 권71 속악조(俗樂條)와 『증보문헌비고』 권106 악고(樂考) 17에 각각 「선운산」과 「선운산곡」이라는 제목과 해설이 실려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사 사람이 정역을 나갔는데, 기한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으므로 그의 아내가 남편을 그리워하면서 선운산에 올라가 남편이 간 곳을 바라보며 이 노래를 불렀다[長沙人征役過期不至其妻思之登禪雲山望而歌之].”

이러한 내용을 보아 「선운산가」는 남편을 그리는 아내의 노래, 즉 망부가(亡夫歌)라고 부를 수 있다. 그 노랫말은 아내가 멀리 떠나 있는 남편을 그리워하고 그 안부를 걱정하는 마음을 형상화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징]

백제는 북방의 고구려와 동남방의 신라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요소 때문에 자체 내의 영토 수호를 위해 진력하는 한편, 중국 남조와의 제휴를 통해 양대 침략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그래서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비교적 넓은 평야를 가진, 순후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성(城)·책(柵)이 훨씬 많았으며, 항해술도 매우 발달했다.

백제의 건국 초기에는 북방의 말갈과 낙랑이 빈번히 침략해 왔으며, 백제가 어느 정도 나라의 기틀을 잡아 안정세에 접어들자 고구려의 침략이 증가하였다. 결국 개로왕(蓋鹵王)이 고구려군에 의해 피살됨으로써 웅진(熊津)으로 천도하기에 이르렀다. 신라가 침략한 경우는 거의 백제의 침략과 약탈에 의한 실지 회복의 소극적 양태를 띨 따름이었다. 여하튼 백제는 동북쪽의 낙랑과 말갈에게 잦은 습격을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부단히 남진 정책을 펴 신라를 공략했던 것이다. 신라에 대한 빈번한 침공은 결국 신라로 하여금 당군(唐軍)과 연합하게 함으로써 백제의 멸망을 자초하기에 이른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볼 때, 백제는 개국 초부터 마한(馬韓)을 점거함으로써 영토를 확장, 국세를 떨쳐 고구려의 남하와 신라의 틈바구니에서 적지 않은 싸움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성(城)·책(柵)을 세우는 일뿐 아니라 군역(軍役)을 위해서도 많은 사람들을 징발했다. 『백제본기』3 진사왕(辰斯王) 2년조에 15세 이상의 남자를 징발하여 각종 역사(役事)에 종사시켰다는 기록은 그런 사실을 잘 보여준다. 게다가 백제가 웅진으로 도읍을 옮김에 따라 궁중의 신축·중수를 위해 많은 백성들의 정역이 요구되었다.

그러므로 정역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일은 보편적이었을 것이며, 거기에 얽힌 많은 설화와 민요가 불렸을 것임은 자명하다. 「선운산가」선운산이 위치한 지리적 여건으로 보아 백제 중·후기에 부녀자들 사이에서 불린 노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운산가」를 아내가 남편을 그리는 노래로만 해석하기에는 두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하나는 선운산이라는 지명이 뜻하는 특수성이며, 다른 하나는 산에 올라가 바라다보며 노래했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의문을 연결해 보면 「선운산가」가 단순한 망부가(亡夫歌)라기보다는 어떤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노래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선운산은 일명 도솔산(兜率山)이라 부르는데, 육당 최남선의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에 따르면 ‘도솔’이라는 말은 불교적 성격을 띠며, 도솔사은 하나의 미륵도량이 된다. 재래의 토속 민간신앙이나 신흥 종교들은 예외 없이 ‘미륵’을 신앙의 핵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신도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한국 불교사상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정토 사상과 쌍벽을 이룬다.

이 두 사상은 미래에 있을 낙원에의 지향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이것은 아마도 피지배층이 겪는 삶의 숙명적 어려움과 인고로 점철된 한국사의 맥락 위에서 이해해야 마땅하다. 따라서 「선운산가」는 단순히 남편을 그리워하는 노래라기보다 종교적 기원이 담긴 가요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산꼭대기에서 멀리를 바라다보면서 불렀다는 내용의 해석이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산정에서 멀리 가서 돌아오지 않는 임을 그린다는 것은 숭고한 그리움의 한 양태이다. 산정(山頂)은 하늘과 가장 가깝다는 점에서 한울임에게 하소연하는 신성처요, 눈 아래로 하계가 내려다보일 뿐 아니라 멀리 볼 수 있는 사실에서 희원(希願)의 장소가 된다. 그러므로 ‘망(望)’에는 간절한 바람이 들어 있고, ‘가(歌)’에는 애절한 호소가 스며 있다고 할 수 있다.

선운산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심원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는 336m이다. 서쪽으로는 광활한 서해와 인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곰소만[줄포만]을 건너 국립공원인 변산반도를 바라보고 있다. 또 주변에는 경수산[444m]·청룡산[314m]·구황봉[298m]·개이빨산[345m] 등 수려한 산과 봉우리들이 둘러싸여 있어 ‘호남의 내금강’이라고 불린다. 본래 도솔산(兜率山)으로 불렸으나 백제 때 창건한 거찰 선운사가 자리 잡고 있어 이후 선운산이라 널리 불리게 되었다.

선운산은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울창한 수림과 계곡, 사찰과 많은 문화재가 있어 이 일대의 43.7㎢가 1979년 12월에 선운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입구에서 약 4㎞에 걸쳐 천연기념물 제184호인 동백나무숲이 펼쳐져 있으며, 봄에는 꽃병풍을 이룬 계곡의 아름다움이 절경을 이룬다.

선운산 남동쪽 사면에 있는 선운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이다. 주요 사찰로는 선운산 동쪽 사면의 말단부에 있는 선운사와 그 서쪽 1㎞ 지점에 위치하는 참당암(懺堂庵)이 있다. 참당암은 신라 진흥왕 때 의운(義雲)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문화재는 대부분 분실되거나 또는 일제에 의한 약탈로 없어졌다고 한다. 선운사는 577년(위덕왕 24)에 검단(黔丹)이 창건한 뒤 여러 차례 보수와 증개축을 해왔다. 한때는 50여 개의 암자를 거느리기도 했으나 현재는 네 개의 암자만 남아 있다.

경내에는 선운사 대웅전(보물 제290호)·선운사 금동보살좌상(보물 제279호)·선운사 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 등의 보물 3점과 ‘선운사석씨원류(禪雲寺釋氏源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4호) 등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있다. 또한 절 입구에는 미당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 시비(詩碑)가 있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청소년 수련원인 ‘자연의 집’이 나오고 계속해서 계곡을 더 올라가면 신라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중생 제도를 위해 도솔왕비와 중애공주를 데리고 입산, 수도하였던 좌변굴[左邊窟, 또는 진흥굴(眞興窟)]과 도솔암(兜率庵)이 있다. 도솔암선운사 계곡의 절경을 이룬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앞에는 천인암(千仞岩)이라는 절벽이 있고, 그 사이의 깊은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도솔암 서쪽의 암벽 위에 내원궁(內院宮)이 있으며, 그 밑의 40여m 절벽에는 미륵장륙마애불(彌勒丈六磨崖佛)이 조각되어 있다. 이 밖에도 신선이 학을 타고 내려왔다는 선학암, 봉황 머리 모양의 봉수암, 절을 굽어보고 있는 독수리 형상의 수리봉 등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특히 낙조대에서 바라보는 칠산바다, 변산반도, 곰소만[줄포만] 지역의 일몰 광경은 장관을 이룬다.

선운사 일대의 특산물로는 복분자로 담근 복분자주와 동백기름이 유명하고, 별미 음식으로는 조갯국과 함께 나오는 표고버섯덮밥, 풍천장어구이가 손꼽힌다. 풍천장어는 주진천(舟津川)[인천강]이 서해에 합류하는 심원면 월산리 부근에서 많이 잡히며 양식도 하는데 독특한 양념구이가 일품이다. 앞으로 변산반도국립공원과 내장산국립공원을 연결하는 관광권 개발이 기대된다.

다른 한편, 망부석 설화는 절개 굳은 아내가 외지에 나간 남편을 고개나 산마루에서 기다리다가 만나지 못하고 죽어 돌이 되었다는 설화이다. 망부석의 유래 설화로, 아내가 죽어서 돌이 된 것이 아니라 자연석인 돌에서 기다려 그 돌에 망부석이라는 이름이 붙은 경우의 설화도 이에 해당된다.

대표적인 설화는 신라시대 박제상(朴堤上)의 아내가 치술령에서 죽어 망부석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눌지왕 때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간 왕제(王弟)를 구해온 박제상은 집에도 들르지 않고 바로 일본에 건너가 또 다른 왕제를 구해 보낸 뒤 일본에서 신라의 신하임을 고집하다 죽는다.

그의 아내는 일본에 간 남편을 기다리다 죽어서 망부석이 되고, 그곳 주민은 부인을 칭송한다. 박제상의 부인은 죽어서 치[審]라는 새가 되고, 같이 기다리다 죽은 세 딸은 술(述)이라는 새가 되었다는 전설도 있고, 이들 모녀가 심술령신모(審述嶺神母)가 되었고, 이에 주민들이 사당을 지어 모셨다는 기록도 있다.

엄밀히 말해서 사람이 돌로 변한다는 화석(化石) 모티프는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돌’이라는 단어에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찬양받을 만한 기념물이라는 뜻이 있다. 훗날 이러한 돌로 기념비를 세우거나 죽은 장소에 있던 자연석을 기념하는 대상물로 삼게 되면, 그곳 주민은 망부석[기념비나 자연석]을 대할 때 훌륭한 부인을 대할 때와 같은 경건한 존경심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줄이면 바로 사람이 죽어 망부석이 되었다는 화석(化石)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부인이 죽어 새가 되었다는 「치술령망부석전설」에서의 새의 의미는 일본에 건너간 뒤 소식이 없는 남편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새가 되어 훨훨 날아 바다를 건너가고 싶은, 살아서의 공간을 극복하려는 의지이다. 부부의 만남이 살아 있는 몸으로는 불가능하므로 죽은 뒤에 새가 되어 소원을 푸는 것이니, ‘이 몸이 새가 된다면’ 하는 살았을 적의 소원이 죽어서 실현이 되었다는, 죽음을 초월한 부부의 사랑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새가 되어서라도 아버지를 만나고 싶은 소원 때문에 딸도 새가 된 것이다.

경상북도 월성군 외동면의 치술령 아래에 이들 새가 살았다는 은을암(隱乙庵)과 위패를 모신 당(堂)이 있다. 오랜 기념 정신은 망부석으로, 죽어서라도 만나겠다는 의지는 새로, 주민의 부인에 대한 존경심과 신앙심은 산신으로 나타난 것이다. 전라북도 정읍시 정읍사공원에 있는 망부석은 아내가 장사를 나간 남편을 기다리던 곳을 기념한 돌이며 여기에 「정읍사(井邑詞)」 노래와 이 노래를 이야기로 꾸민 전설이 있는데, 이것도 오랜 기념 정신을 뜻하는 것이다.

경상북도 영일군의 「망부산솔개재전설」은 신라 말 경애왕 때 소정승(蘇政丞)이 일본에 사신으로 가 돌아오지 않자 부인이 산에 올라가 기다리다 지쳐 죽어 산 이름이 망부산이 되었으며, 부인을 기념하는 뜻에서 사당인 망부사(望夫祠)를 짓고 같이 기다리던 개와 말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는 내용으로, 「치술령망부석전설」의 변형이라 하겠다. 다만 망부석이 망부산으로 규모가 커진 것이 다르다. 고기를 잡으러 갔거나 혹은 중국에 사신으로 간 남편을 기다리다가 아내가 떨어져 죽었다는 서해안의 「낙화암전설」도 이 망부석 설화의 변형으로 보인다.

역사적인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한 여인이 정절을 형상화하고, 후세 주민은 이를 기리는 내용인 망부석 설화는 한국인의 의식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삼국시대에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를 표현한 민속 가요들이 다양해지고 폭넓게 발전하였다. 이 시기에 우리 선조들 속에서 창작되어 즐겨 불린 민속 가요에서 주요한 비중을 차지한 것은 민요였다. 이중 백제 사람들이 즐겨 부르던 민요 가운데서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는 「산유화」와 「정읍사」 등이 있다.

「산유화」는 백제 말기에 창작된 노동민요의 하나로서 오랜 기간 구전되어 오다가 조선 후기에 수집된 민요이며, 「정읍사」는 백제의 정읍현에 사는 어느 상인의 아내가 장사하러 멀리 떠나간 남편을 그리면서 지어 부른 인정세태 민요의 하나이다.

“정읍(井邑)은 전라속현(全羅屬縣)으로 그곳 행상인의 처가 산에 올라 멀리 바라보면서 남편이 밤에 오다가 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진흙의 더러움에 비유하여 노래한 것이다[井邑 全羅屬縣縣人爲行商久不至其妻登山石以望之恐其夫夜行犯害托泥水之汚以歌之].”

하 노피곰 도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전(全)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 드욜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가논 졈그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백제 사람들이 창작한 민요에는 그밖에 노래 제목과 창작 경위만 전해지고 있는 「지리산」, 「선운산」, 「무등산」, 「방등산」 등이 있다. 「지리산」은 당시 최고 권력자인 국왕의 위협과 공갈에도 굴복하지 않고 절개를 끝까지 고수한 마음씨 깨끗한 백제 여성들의 아름다운 도덕적 품성을 반영한 노래이다. 『증보문헌비고』 악고(樂考)에 실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구례현 사람의 딸이 지리산 밑에 살았는데, 자색이 있고 부녀의 도리를 극진히 하니, 왕이 그 아름다움을 듣고는 궁중에 들이려고 하자, 여자가 노래를 지어 죽기를 맹세하고 따르지 아니하였다[求禮縣之人女惟姿色居智異山家貧盡婦道百濟王聞其美欲內之女作是歌誓死不從].”

「선운산」은 당시 봉건국가가 강요한 병역, 부역에 동원된 남편을 기다리는 백제 여인들의 애타는 심정을 반영한 노래이며, 「무등산」은 광주[무진주]에 있는 무등산에 산성을 쌓아 백성들이 외래 침략자들의 침입을 받지 않고 살게 된 기쁨을 노래한 작품이다. 『증보문헌비고』 악고(樂考)에 실린 「무등산」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광주(光州)에 무등산이 있는데, 백제 때에 이 산에 성을 쌓으니 백성들이 이를 힘입어 편하게 삶을 즐거워하여 노래한 것이다[無等山廣州之鎭山州在全羅巨邑城此山民賴以安 樂而歌之].”

「방등산」은 『고려사』 권71, 삼국속악조에 가사는 전하지 않고 노래의 내력만 전한다. 『고려사』에는 제목이 「방등산」으로 되어 있고 『증보문헌비고』에는 「반등산곡(半登山曲)」으로 되어 있다. 「방등산」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방등산(方登山)은 나주의 속현(屬縣)인 장성(長城) 경계에 있다. 신라 말 엽 도적이 크게 번져 이 산에 은거하여 양가(良家)의 자녀들을 많이 잡아가는 등 노략질을 했다. 이때 장일현(長日縣)의 한 여인이 이 가운데 있었는데, 이 「방등산가」를 지어 그 남편이 구하러 오지 않는 것을 풍자하였다[方登山在羅州屬縣長城之境新羅末盜賊大起據此山良家子女多被擄掠長日縣之女亦在基中作此歌以諷其夫不卽來救也].”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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