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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리 동촌 당산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1519
한자 龍井里東村堂山祭
영어음역 Yongjeong-ri Dongchon Dangsanje
영어의미역 Village-Ritual Ceremony of Dongchon Village, Yongjeong-ri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의례/제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용정리 동촌마을지도보기
집필자 송화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마을 신앙|마을 제사
의례시기/일시 음력 1월 14일
의례장소 마을 당산과 천룡당
신당/신체 입석과 나무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용정리 동촌마을에서 정월 열나흘에 풍농을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용정리 동촌마을 당산제는 고창군 해안 지역 어촌인 동촌마을에서 음력 정월 열 나흗날에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공동의 제사이다. 동촌마을은 ‘광포(光浦)’라는 지명으로 불리는 섬포의 동남쪽 해안 마을이었다.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광포는 조선 시대 때 목포, 범성포에 버금가는 조곡을 납세하는 세금 집합소 가운데 하나로, 500~600여 호에 가까운 집단촌이었다. 그러나 그 후 세금 수납처로서 역할이 상실되면서 광포는 동촌과 서촌으로 나누어졌으며, 현재는 동촌으로 통합하여 부르고 있다.

현재 동촌마을은 총 48가구 124명이 거주하고 있다. 서촌은 1가구가 남아 있으나 마을에서 거주하지 않으므로 사실상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동촌 사람들의 생업은 예전에는 바다에서 고기잡이로 터전을 가꾼 어부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지형 변화로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농사를 짓고 산다. 그러나 아직 마을의 1~2가구는 ‘선뫼기’라고 하는 소형 배를 소유하고 있다.

[연원 및 변천]

동촌마을의 당산제는 조선 후기 자연 마을이 생성되면서 동반된 동제로서 역사는 약 300년 정도가 된다. 해안 마을은 처음에 풍어제로서 동제를 지냈으나 해안 지형의 변화로 당산제 중심의 동제로 변화하였다.

동촌마을에는 원래 12개의 당산이 있었다고 하나, 세월이 지나면서 3곳으로 축소되었다고 한다. 1997년 당산제 때만 해도 3개의 당산 이외에 동촌 천룡, 서촌 천룡, 동촌 샘, 서촌 샘의 4개의 천룡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동촌 천룡을 제외한 3개의 천룡들은 더 이상 제의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 이처럼 당산이 사라진 것은 농가 소득을 목적으로 마을 개발이 이뤄진 것이 직접적인 동기였다. 이 마을은 원래 사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1960년대에 사구를 헐고 농지로 만들기 시작하면서 당산들이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할아버지 당산과 총각 당산은 할머니 당산이 있는 곳으로 옮겨 왔다. 당산이 있는 곳은 마을 뒤편으로 한 쪽으로는 바다와 접해 있고, 다른 한 쪽으로는 농지와 접해 있는 모래밭에 위치하고 있다. 당산은 세 개가 함께 모셔져 있는데, 마을 쪽을 향하여 원을 그리듯 서 있다. 마을에서 바라 볼 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할아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 총각 당산의 순으로 위치한다. 당산은 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바닷가라 바람이 불면 당산이 모래에 묻히기가 여러 번이었으나 그 때마다 다시 찾아 보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신당/신체의 형태]

당산제의 대상이 되는 신격은 할머니 당산, 할아버지 당산, 총각 당산과 하나의 천룡이다. 3곳의 당산과 당산제를 함께 올리기 때문에, 당산제와 천룡제가 병행된다고 보아야 한다. 당산은 입석으로 할머니 당산과 할아버지 당산에는 줄을 감아 놓았다. 세 개의 당산은 원래 각각 따로 있었던 것을 현 위치로 합쳐 놓은 것인데, 할머니 당산만 옮기지 않고 원래의 위치에 있다. 할아버지 당산은 원래 마을의 서쪽 논 가운데 자리하고 있었고, 총각 당산은 서촌마을에 있었던 것을 1990년대 초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할아버지 당산은 몸체 위에 두 개의 돌이 있는데, 이를 꽃봉오리 모양 혹은 갓 모양이라고 한다. 할머니 당산[할미 당산]은 사람 머리 형태의 조그만 돌을 몸체 위에 얹어 놓았으며, 돌 앞면에는 사람의 이목구비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할머니 당산의 원래 모습은 사람보다 훨씬 큰 303~333㎝ 정도이며, 두상 또한 꽃봉오리 모양으로 할아버지 당산과 비슷했다고 한다. 동촌마을의 천룡은 마을 수호신의 중심에 위치한 주신으로서 당산 신체와 함께 마을 수호의 기능을 하고 있다.

[절차]

동촌마을 당산제는 ‘화주’와 ‘부화주’를 선출하여 주관하게 한다. 화주와 부화주는 음력 1월 7일이나 8일 마을 회의를 통해 깨끗하고 생기 복덕이 있는 사람을 가려 뽑는다. 화주는 선정된 날부터 2년 간 근신하는데, 더러운 곳에 가는 것을 금하며 먹는 것도 가려서 먹는다. 또한 제사를 모시기 전에 화주와 부화주는 우물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이렇게 까다롭기 때문에 서로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마을에서 지정하면 어쩔 수 없이 하게 된다. 지금은 예전과 같이 엄격하게 금기를 지키지는 않으나 여전히 화장실을 출입하면 목욕을 하고, 제사를 모시기 전에 목욕하고 머리를 감아 깨끗하게 한다고 한다.

제사 비용은 주민들의 인구 전으로 각각 5,000원 정도씩 걷고, 나머지는 희사금으로 충당한다. 2005년 당산제의 비용은 200만 원이 소요되었다. 예전에는 굿치고 마을을 돌면서 집집마다 성의대로 돈이나 쌀을 받았다고 한다. 이를 걸립이라 하는데, 궂은 사람에게는 쌀이나 돈을 받지 않고 받더라고 따로 받았다.

열 나흗날 화주와 부화주가 함께 장에 가서 제물을 마련한다. 대체로 가까운 상하 시장을 이용하고, 화주와 부화주 이외에 마을 사람들 가운데 깨끗한 사람이 함께 가는 경우도 있다. 이 때 동행한 사람은 심부름만 하며, 제물이나 다른 것에 절대 손을 대지 않는다. 제물을 구입할 때는 입마개[마스크]를 하고 말을 금한다. 물건 값을 깎는 법이 없으며, 장을 보고 오다가 사람을 만나면 외면한다. 그러나 지금은 택시를 타고 곧바로 마을로 들어오기 때문에 오다가 사람을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예전부터 시중에서 파는 술은 성의가 없다고 하여 직접 제주를 만들었으나 올해는 마을 어른들이 분주하다는 이유로 양조장에서 구입하였다. 그리고 제기도 항상 새롭게 장만을 한다.

제수는 열나흘 낮부터 마을 회관에서 장만하기 시작한다. 원래는 할머니 당산 앞에 천막을 치고 화주와 부화주만이 마스크를 쓰고 장만을 하였다고 한다. 이는 침이 음식에 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며, 맛을 보거나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만약 음식 장만을 하면서 간을 보면 음식을 대는 순간 입이 부어오른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은 마을 회관에서 마을 사람들이 함께 장만하고 있다. 마을 회관이 제수 장만을 하는 공간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회관 안에 금줄을 치고 정갈히 한다.

금줄은 또 마을 입구 네 곳과 화주 집, 부화주 집, 당산과 천룡에도 친다. 금줄은 왼새끼에 한지를 꽂은 것으로 14일 새벽에 치고, 당산제가 끝나면 걷어 들여 한 쪽 귀퉁이에 치워 놓는다. 또한 황토를 ‘금토’라 하는데, 화주집 앞에 조금씩 뿌린다. 제의를 모시기 전에 마을 사람 가운데 애를 낳거나 부정한 일이 생기면 당산제는 음력 2월 1일로 미룬다. 그러나 짐승들이 새끼를 낳는 경우는 가리지 않는다. 마을 사람 가운데 제 모시는 날인 14일 갑자기 산기가 있으면 애를 낳기 위해 다른 마을로 간다. 이는 마을에서 애를 낳으면 제물 비용을 아기를 낳은 사람이 물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동촌마을 당산제는 본래 음력 1월 14일 밤 12시경에 시작되어 15일 새벽녘 닭이 울 때까지 제를 모셨다고 하나, 2005년에는 14일 밤 8시 40분 정도에 제를 모시러 가기 시작하였다. 이를 마을 사람들은 일기가 나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나 당산제가 약화되는 과정 중에 자연스레 일어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산제를 모시러 가기 전에 마을 주민들은 마을 회관에 모여 있었으며, 특히 여자들은 장구 등으로 박자를 맞추며 노래를 부르는 등 놀기 시작하였다. 여자들은 당산제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당산제가 진행되는 동안 마을 회관에서 계속 노래를 불렀으며, 당산제가 끝나고 난 후에도 계속해서 흥겹게 즐겼다.

당산제는 천룡과 당산 두 곳에서 모셔졌다. 제는 먼저 천룡에서 모셔지는데, 마을 뒤 언덕의 큰 소나무 아래에서 모셔졌다. 마을 회관에서 천룡으로 가는 동안 계속 풍물을 치면서 갔으며, 이를 ‘젯굿’이라 한다고 한다.

밤 8시 50분부터 제의가 시작되었다. 화주와 부화주는 원래 한복에 두루마기를 입어야 하나, 올해는 제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평상복 차림이었다. 화주와 부화주 그리고 축관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이는 제를 지내는 동안에 부정을 예방하고 침이 튀어 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당산제는 먼저 화주와 부화주가 단배한 후에 축관이 독축을 하였다. 축문 후에 소지를 하고 다시 단배를 하였다. 절을 마친 후에 헌식을 하는데, 미리 준비한 백지에 제물들을 조금씩 싸서 묻었다. 그 후 음복을 하였다. 제를 모시는 동안 풍물은 계속 되면서 천룡 주의를 돈다.

제물은 흰 시루떡과 조기, 동태, 나물, 과실, 돼지고기와 함께 메밀범벅과 메밀묵을 준비하였다. 원래는 쇠고기를 마련해야 하는데 올해는 형편상 돼지고기로 대신한 듯 했다.

밤 9시 5분경에 천룡에서의 제의가 끝나자 다시 풍물을 치면서 당산으로 이동했다. 당산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예전 샘 자리에서 풍물을 쳤다. 이곳 또한 8년 전만 해도 제를 모시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모시지 않고 있었다. 주민들은 샘을 식수용으로 사용했을 때는 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상수원 보급이 잘 되어 마을 샘을 사용하지 않기에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만 다음 날 당산에 줄을 감으면서 함께 주위 정화 작업을 한다고 한다.

천룡에서 당산이 있는 곳까지 이동하는 시간은 약 5분이 소요되었으며, 밤 9시 10분경에 당산에 도착하여 진설하고 제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 그리고 총각 당산을 모두 한꺼번에 모시며, 역시 제를 모시는 동안 풍물이 계속되었다. 원래는 3개의 당산을 각기 따로 모셨으나 지금은 합하여 함께 모신다고 한다.

제의의 내용과 제물은 천룡과 동일하였으며, 제물의 뫼만을 옮겨 사용하였다. 10여분의 제의가 끝난 후 헌식하면서 제물 중에 메밀범벅을 할머니 당 뒤 쪽에다 버렸다. 이것은 제를 지내는 동안에 혹시 왔을 잡신들을 쫓아버림으로써 동네의 평안과 안녕을 빌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는 서해안을 중심으로 어민들에게 전승되었던 부와 풍요를 가져다주는 도깨비 신앙의 흔적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축문]

유 세차병자정월병진삭십오 유학감소고우 천룡지신[당상지신] 어춘고차촌임우자영 무우고정일안정근이주맥서차지천우신상(維 歲次丙子正月丙辰朔十五 幼學敢昭告于 天龍之神[堂上之神] 於春顧此村臨于玆永 無憂故靜逸安定謹以酒麥庶差祗遷于神尙).

[부대행사]

줄다리기를 거행한다. 당산제를 모신 다음 날인 보름날 아침이 되면 마을 사람들은 다시 마을 회관으로 모여 줄다리기를 준비한다. 아침 8시부터 준비를 시작하며, 막대기를 이용하여 줄을 다린다. 줄은 쌍줄로 암줄을 여자 줄이라 하고 숫줄을 남자 줄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줄이 27겹의 굵기로 젊은 사람이 줄 위에 앉으면 발이 땅에 닿지 않을 만큼 컸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9겹으로 만든다. 암줄과 숫줄의 구별은 외형상으로 구분하지 않고 북쪽에 있는 것을 암줄, 남쪽에 있는 것을 숫줄이라고 한다. 암줄과 숫줄을 연결할 때는 비녀를 꽂고 힘껏 묶으면 절대 빠지지 않는다. 이를 마을 사람들은 “결혼식을 시킨다.” 또는 “신랑 신부처럼 짝을 붙인다.”는 식으로 표현하였다. 예전에는 줄을 ‘성(聖)줄’, ‘용줄’이라 하여 땅에 닿지 않게 귀하게 다루었다.

줄다리기는 마을 앞 큰길에서 하는데, 밖에서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쪽에 남자들이 서고 그 아래쪽 길로 여자들이 선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며, 미혼은 여자 편으로 들어간다. 여자들이 이기면 풍년이 들고 남자들이 이기면 풍년이 들어도 여자들이 이긴 만큼은 못하다고 하여 고의는 아니더라도 남자들이 져준다고 한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묶여 있는 암줄과 숫줄을 풀어서 어깨에 멘다. 그리고 예전에는 굿을 치면서 마을을 한 바퀴 돌았으나 지금은 사람이 부족하여 마을을 돌지는 못한다고 한다.

예전에는 남자들만 줄을 메고 가서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에 줄을 감고, 여자들은 모여서 놀거나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숫줄인 남자 줄은 남자가 메고, 암줄인 여자 줄은 여자들이 메고 당산으로 간다. 그리고 남자들이 먼저 할아버지 당산에 줄을 감고 난 뒤 여자들에게 줄을 넘겨받아 할머니 당산에 줄을 감는다. 줄은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에만 감는다. 이를 “당산 옷 입힌다.”라고 한다. 총각 당산에는 감지 않는데, 이는 “총각이기 때문에 옷을 입히지 않는다.”고 한다. 할아버지 당산에는 숫줄을, 할머니 당산에는 암줄을 감는다.

줄을 감을 때는 꼬리부터 감으며 머리는 맨 위로 올라가게 한다. 감을 때 화주가 꼬리를 당산에 대 준다. 작년에 감은 줄이 그대로 썩어 있는데, 그 위에 화주가 줄을 대면 그 때부터 사람들은 줄을 잡고 돈다. 이때 사람들은 넘어지기도 하고 줄에 걸리기도 하는 등 서로 장난을 치기도 한다. 이를 ‘줄쌈’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남자들만 메고 다녔으므로 장난을 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여자들도 참여하므로 장난이 심해졌다고 한다.

줄을 모두 감고 나면 마을 사람들은 마을 회관에 다시 모여 잔치를 벌이고 당산제에 관한 결산을 하게 된다. 이를 대동계라고 하며, 작년도 결산과 함께 마을의 전반적인 의논 사항과 앞으로 해야 할 사업들을 의논한다. 마을에 대동계의 내용이 기록된 회의록이 두 권 전해지고 있었으나 3년 전 쯤에 유실되었다고 한다.

[현황]

2010년 현재까지 제사를 지내고 있다. 용정리 동촌마을 당산제는 해안 지역에 12당산이 있는 마을이었다. 그러나 새마을운동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12당산이 축소되고, 천룡과 당산이 훼손되는 사례가 발생하여 당산 문화를 보존할 가치가 큰 마을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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