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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1415
한자 近代敎育
영어음역 Geundae Gyoyuk
영어의미역 Modern Education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기화

[정의]

구한말에서 해방 이전까지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 이루어진 근대식 교육.

[개설]

근대 교육은 근대 국가의 성립이나 자본주의 사회의 발생과 더불어 시작된 교육으로 주로 계몽 사조를 기초로 나타난 계몽주의 교육을 의미한다. 한국의 경우 근대 교육은 한국의 근대를 어떻게 시기 구분하느냐에 따라 다소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대체로 본격적인 개항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1880년대부터 1945년 해방까지 각종 근대식 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육을 의미한다.

[갑오개혁과 근대 교육]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고 새로운 시험 제도에 의해 인재가 등용될 수 있게 된 것은 그동안 개화 세력이 주장해온 근대적인 관리 등용 제도와 근대 교육 제도가 현실화 되었기 때문이었다. 교육 관리를 위한 중앙 정부의 제도도 대폭적으로 변혁되었다. 종래에 외교와 교육 및 의례를 담당하던 예조(禮曹)를 대신하여 교육 전담 기구로 학무아문(學務衙門)이 설치되었다. 학무아문의 직제는 총무국, 성균관 및 상교서원사무국(庠校書院事務局), 전문학무국, 보통학무국, 편집국, 회계국 등으로 이루어졌다.

학무아문은 1895년(고종 23) 3월 관제 개편 시 학부로 개칭되면서 전문학무국과 보통학무국을 학무국으로 통합하고 업무 내용을 조절하였다. 1895년 7월 19일자로 공포된 소학교령에는 각 부군(府郡)에서는 그 관내에 학령 아동의 취학을 위해 공립 소학교를 설치할 것과 각부의 관찰사는 관내에 공립 소학교를 설치하기 전이라도 사립 소학교를 대용(代用)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것은 당시의 국가 재정이 넉넉하지 못하여 일시에 전국적으로 공립 소학교를 설립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이에 학부에서는 일반인의 학교 설립을 권장하고 이들 사립학교에 보조금을 지급 하였던 것이다. 공립 소학교의 숫자나 위치는 학부대신이 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1896년 9월 17일 학부에서는 지방의 공립 소학교의 위치를 결정했다. 이때 지정된 지역은 한성부와 13도 관찰부 소재지인 수원, 충주, 공주, 전주, 광주, 대구, 진주, 해주, 평양, 정주, 춘천, 함흥, 종성 등 13개 도시와 서울 주변의 개성과 강화 2곳, 개항장인 인천, 부산, 경흥, 원산 등 4곳, 전국의 주요 지역으로 제주, 양주, 파주, 청주, 홍주, 인천, 남원, 순천, 영광, 경주, 안동, 안악, 의주, 강계, 성천, 원주, 강릉, 북청 등 18곳으로 모두 38개 지역이었다.

이들 지역가운데 한성부 소재지인 서울에는 이미 1895년 9월에 관립 소학교가 설립되었고, 인천·대구·충주·강화 등 12개 지역의 공립 소학교에는 이미 1월부터 7월에 걸쳐 교사가 임명되고 있었다. 1896년 9월 17일자로 공립 소학교의 위치로 지정된 지역 중 강원도에 속한 지역은 강원도 관찰부 소재지인 춘천, 원주, 강릉 3곳이었다. 그 다음해인 1897년 9월에는 회양군이 추가로 지정되었다.

소학교의 수업 연한은 3년의 심상과(尋常科)와 2년 또는 3년의 고등과(高等科)로 편제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고등과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이 심상과였다. 그 교과목은 수신(修身), 독서, 작문, 습자, 산술, 체조 등이었고, 시의(時宜)에 따라 체조를 제하고 본국지리, 본국역사, 도화, 외국어 가운데서 하나 내지 몇 개의 과목을 택할 수 있었으며, 여학생은 재봉을 추가할 수 있었다.

개항 이후 일본에 신사유람단으로 파견되었던 박영효, 김옥균 등은 개화 운동의 일환으로 교육 개혁을 강조했다. 또 조선에 파견된 기독교 선교사는 선교와 민중 개화 운동을 위하여 직접 근대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에 나섰다. 그리고 열강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한 유지들은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는 의식의 토대 위에서 근대 교육 운동을 주도했다.

근대 교육을 위해 설립된 최초의 학교는 원산학교였다. 1883년 민간에 의해서 함남 원산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근대학교다. 이 학교는 덕원부(德源府) 주민들이 학교 기금을 모아 설립했다. 이 학교는 외세의 침입에 대항하여 조선인들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 성금을 모아 건립했으며 정부보다 앞서서 근대화 교육을 실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흥동장학계와 일제 강점기 고창 지역 근대 교육]

1910년 국권 상실 이후 더욱 더 거세진 항일 민족 운동이 전개되었음은 우리의 독립 운동사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사항이다. 독립 운동은 무력 투쟁, 교육 운동, 계몽 운동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농촌의 면(面) 단위 유지들이 비밀리 계를 조직하고 독립 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전달하는 한편 자금의 일부를 지방인의 교육에 힘쓰는 경우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흥동장학회의 활동이다.

흥동장학계는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을 중심으로 1914년에 조직되었던 비밀 조직으로 일제 강점기 고창 지역의 항일 운동 단체이자 근대 교육 지원 단체였다. 일제하 통한에 서린 고창의 애국지사들이 표면적으로는 교육에 명목을 두고 이면으로는 항일 투쟁과 그 군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비밀리에 부안군 내소사의 청련암에서 김성수, 송진우, 백관수(白寬洙), 이석열 등이 망국의 타개책을 모색한 바 있었다.

이어 1914년에 교이극일(敎而克日)의 사상으로 면학할 것과 독립 운동을 목적으로 백낙윤(白樂允), 이순열(李舜烈), 황상익(黃尙翼), 백관수, 이휴열(李休烈), 이갑수(李甲洙), 황서구(黃瑞九) 등이 발기하여 계를 조직하여 ‘홍동장학계’라 가칭하고 성내 지역을 중심으로 의기상합(義氣相合)한 인사가 각지에서 모여 96명의 계원을 확보했다.

계원들은 계비를 출연하여 거대한 기금을 조성하고 기금의 일부는 항일 독립 운동의 자금으로 극비 지원했으며 또 다른 일부로는 전답과 임야 등을 구입하여 기본 재산을 마련하고 장학 사업을 벌였다. 따라서 홍동장학계의 주요 활동은 항일 독립 운동의 자금 조달과 장학 활동이었다.

1931년 흥동장학회성내면 양계리 운등산 기슭에 장학당[와가 4간]과 그 부속 건물인 고직사, 창고 등을 건립하였다. 장학당은 흥동장학회의 계원을 중심으로 한 상해 임시 정부 군자금 모집 국내부 호남지부 본부의 근거지가 되었고 호남 일대의 군자금은 이곳으로 집결되었다.

장학 활동과 관련하여 우선 흥동장학회 계원의 자녀에 대해서 보통학교 6학년 통학 시에 장학금 5원을 지급하고 계원 자녀이외의 우수한 극빈자에게도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1912년 부안면 오산리에 일본인 기독교 장로 마스도미가 ‘흥덕학원’을 창설하여 신교육 활동을 하고 있었으나 이 학교를 1919년 3월 25일 사립 성내보통학교로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이순열을 추대하였다. 한편 청년회관도 건립하여 청년들의 심신 단련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사립 성내보통학교는 2년 후인 1924년 3월 19일에 성내공립보통학교로 개칭되어 3학급을 편성하여 같은 해 4월 21일 개교하였다. 이는 오늘 성내초등학교의 시원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이 주권 상실기에 항일 군자금 조달과 교육을 통한 극일 사상을 실천한 흥동장학계는 민족 사학 고창고등보통학교를 창설한 고창군민의 노력과 더불어 일제 강점기 고창 지역 근대 교육사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 교육사에 있어서도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고창 지역 근대 교육 기관]

고창 지역의 근대 교육 기관으로는 1909년 무장초등학교의 설립을 시작으로 1912년 고창초등학교, 1915년 흥덕초등학교[1909년 흥덕학원 설립 인가], 1919년 부안초등학교·고창중학교·고창고등학교, 1922년 해리초등학교, 1923년 대산초등학교·성송초등학교, 1924년 석곡초등학교·성내초등학교, 1928년 신림초등학교, 1929년 공음초등학교, 1931년 상하초등학교, 1933년 아산초등학교, 1934년 고수초등학교, 1935년 선동초등학교·심원초등학교, 1940년 동호초등학교·봉암초등학교, 1941년 매산초등학교, 1945년 고창여자중학교·영선중학교가 각각 설립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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