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010
한자 民族敎育-産室-高敞
영어의미역 Gochang, The Birthplace of National Education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기화

[개설]

주권 상실기의 부호(富戶)[부잣집]들은 대체로 3개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일제를 등에 업고 1900년대 초 이후 형성된 친일파 계통의 부호들이다. 둘째, 구한말 지방 지주들로 자수성가(自手成家)하여 대대로 부를 누리는 부호이다. 셋째, 국내의 자기 지방에서 부를 축적하고 근면과 성실로 일관하며 자신들에게는 구두쇠처럼 검소한 생활을 했던 부호이다. 이들은 인근의 주민들이 재난이나 흉년에는 당연한 의무로 알고 구휼(救恤)하며 덕(德)을 베푸는 것을 공통점으로 지적할 수 있다. 호남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선덕비(善德碑)의 주인공들이 바로 셋째 유형의 경우이다.

이러한 선덕비 주인공인 부호들이 있었기에 우리 민족 교육의 산실인 민족 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고, 끝까지 지켜낼 수 있었다고 본다. 고창 지역의 근대 교육을 통한 지역 자본가들과 민중들의 노력으로 탄생한 민족 사학의 산실인 고창고등보통학교[약칭 고창고보]와 고창의 정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창 지방의 부호와 고창고등보통학교]

민족 사학 고창고등보통학교의 설립에 우선 인식해야 할 것은 일본인 기독교 신자였던 마스도미 야스자에몬[枡富安左衛門]이 경영하던 ‘흥덕학당(興德學堂)’과 ‘고창고등보통학교’ 설립의 재정적 주역으로서 설립 당시 군내 유지였던 강대직, 김재종(金在鍾), 정필환, 오자환, 이현승, 이휴열, 최용균, 홍종철 등 천석꾼 이상의 부호와 재산세 납부 대상자인 군민의 재정 지원이 없었던들 고창고등보통학교는 설립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고창고등보통학교는 당시 고창 지방의 부호들을 중심으로 재산세 납부 대상의 군민 합동으로 세워진 민족 사학이라는 점이다.

1. 마스도미의 도움

일본인 마스도미가 농업 이민을 희망하면서 광활한 평야 지대인 김제 지방을 택하지 않고 당시로서는 벽지인 부안면 오산리(五山里)를 택하게 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즉, 그는 처음부터 순교자적인 심정에서 출발하였다.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것이 아니라 ‘약탈한 것’이기 때문에 한국인들에게 끼친 정신적·물질적 상처를 조금이라도 보상하고 속죄하기 위하여 오산리에 정착한 것이다. 그는 1911년 12월 11정보의 땅에 사과밭을 마련하여 3,500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었다. 그의 농장 운영 계획표에 의하면 1920년에서부터 1927년도까지 5,000원 내지 22,300원의 연간 수익을 예상하고 있었으며, 과수원 수입으로 학교 경영과 자선 병원을 운영할 작정이었다.

그는 1912년 11월 21일 ‘흥덕학당’을 설립하였다. 1918년 2월에는 흥덕학당을 폐지하고 같은 해 4월 사립 ‘오산보통학교’를 설립함으로써 비로소 소학교 교육 과정의 정규 학교가 된 셈이다. 1919년 4월 14일에는 다시 7명의 추가 모집으로 사립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하여 제1학급을 편성, 중학교과정까지 경영하게 되었다. 1920년에 는 최초로 30명의 학생을 수용하였다. 마스도미가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한 것은 덴마크의 구룬드비히가 설립한 고등공민학교를 모델로 하여 한국의 농촌을 개발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계 제1차대전이 종료된 이후 약소 민족 자결주의 팽배라는 정칮거 이슈와 더불어 경제공황기의 도래로 중학교를 유지하기 곤란하여 폐교이 위기를 맞게 되었다. 양태승과 같은 고창군 내 유지들에게 인계하기로 한다. 이에 당국의 호의로 오산고등보통학교는 1923년 4월 오산공립보통학교가 되어 교사 등 일체를 기부의 형식으로 고창군에 인계하였다.

2. 군민의 열성적 참여

마스도미가 오산고등보통학교의 운영에서 손은 뗀 당시 교장이었던 양태승은 재단법인체를 구성하여 고창민립학교 설립을 구상하였다. 그리하여 군민 유지들의 열성적 참여로 과도기적이나마 학교 운영을 계승하기 위하여 재정 염출과 운영체를 만들어야 했다. 양태승은 당시 고창군수 천장욱, 군내 유지 강대직, 김재종, 오자환, 이휴열, 최용균, 홍종철 등의 지지와 찬동을 얻어 1922년 2월 2일 고창군민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마침내 전 군민으로의 확대를 보아 군민으로서 군내에 소유한 토지의 법정 지가의 100분의 6.50, 즉 백 원에 대하여 6원 50전이라는 근거가 산출되어 학교 기금 30만원, 교사 건축비 5만원 계 35만원을 조성할 것을 군민 대회의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

고창 군민 대회 당일부터 당시 천장욱 군수실은 고창고등보통학교 유지 문제를 위한 회합의 장소가 되어 전 행정력을 동원하여 토지 대장의 정비와 거출금 부담액 책정 작업에 들어갔다. 1922년 2월 10일에는 고창고등보통학교 유지 문제를 위한 존치위원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1922년 6월 1일에는 고창고보존치집행위원회에서 재단법인 고창고등보통학교 설립준비위원회로 개칭하고, 12월 28일 거출금 확정을 위한 군민 유치 대회를 가지니 2월 2일 이루어진 역사적인 고창 군민 대회는 비로소 완성을 보게 된 것이다.

당시 거출금 마련에 있어서 자기 소유의 토지를 법정 지가의 비율에 따라 기부한 사람은 무려 5천 5백여 명에 달하였다. 말하자면 5천 5백여 명이 교주인 셈이다. 당시 고창의 인구가 14만 명으로 자기 소유의 토지를 한 평이라도 가진 사람이면 거출에 참여하고 실질적인 교주가 된 것이다. 실로 민중의 학교로서 고창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이때 모은 35만원 중 20만원은 학교 설립 운영 자금으로 하고, 15만원으로 고창읍 교촌리고창고등학교의 자리에 붉은 벽돌집 2층 연건평 290평의 웅장한 교사를 신축하게 된 것이다.

3. 고창고등보통학교 인가

1922년 4월 1일 고창 군민은 사립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였던 바, 당시 학생 수는 제4학년까지 총 180명이었다. 그리고 초대 교장은 명의상 마스도미를 그래도 존치하고 실질적인 운영자였던 양태승을 교장 대리에 임명하였다. 1922년 6월 3일 고창고등보통학교마스도미의 꿈이 어리던 오산리 땅을 떠나 고창읍으로 이사하였다.

1922년 7월 7일자로 본교 기본 재산으로 재단법인 고창고등보통학교의 설치 인가를 받았고, 1923년 7월 7일자로 교명을 정식으로 ‘고창고등보통학교’로 개칭하여 인가를 받았다. 동년 12월 1일부터는 향교의 명륜당과 사마재와 모양성내에 위치한 구 고창군 청사를 임시 가교사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2월 10일에는 고창읍 읍내리 성산 기슭에 터를 골라 부지 7,346평에 신축 교사 290평의 공사를 착공하여 1925년 6월 25일 본관 1동의 준공을 보게 되었다.

1924년 3월에는 고창 땅에서 처음으로 제2회 졸업생 7명을, 그 다음해에는 제2회 졸업생 9명을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제1회 졸업생 7명의 지역 분포를 보면 고창 2명, 서울 1명, 경기 1명, 경북 1명, 평북 1명, 평양 1명의 출신이었다. 제1회 졸업생의 지역 분포가 예시해 주듯 역대 고창고보 학생들은 13도에서 모여 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교사였던 심준섭이 작사하고 현제명이 작곡한 고창고보의 「교가」에서도 말해 주고 있다. “갈재맥 받아온 성산 기슭에/ 우뚝이 서 있는 웅대한 집은/ 빼나고 씩씩한 쾌남아들이/ 나날이 자라나는 고창 밭일세/ [후렴] 이 밭에 자라난 보리/ 십삼도 근역에 두루 퍼지고/ 이 밭에서도 자라난 보리/ 온 세계 곳곳에 씨가 되겠네, 씨가 되겠네.”

4. 고창고보의 교사진

초창기의 교사들은 13명이었는데, 이들은 당대에 전국에서 이름 있는 교사들이었다. 즉 양태승[교장 대리], 이종오[이화학, 생물, 실업], 송태회[국어, 한문], 심준섭[일어, 교무주임], 김연건[영어], 이혁[일어, 일본 역사], 유찬식[수학], 정인승[영어], 이병학[체육], 홍순복[영어], 이세종[생리위생, 교의], 진규상[서무, 고창군에서 옴], 그리고 일본인 교사 1인[일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 중에서도 특히 송태회, 유찬식, 정인승, 이병학은 더욱 유명하였다. 송태회는 동몽진사(童蒙進士)로서 서예에 능하였고, 9세 때 쓴 글씨는 청나라 원세개가 가보로 삼겠다고 할 정도였으며,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는 성균관 학생들이 올리는 상소문을 혼자 도맡아 썼다고 한다. 그는 자기가 담당한 시간에 조선 역사와 한글을 가르치기도 하고, 특히 황의돈이 쓴 한국 역사를 중심으로 풍부한 야화와 야사를 곁들여 가르침으로써 민족혼을 불러 일으켰다.

유찬식은 일본 동경물리학교의 괴재였던 바, 당시 중앙학교에서 초빙하려 했던 사람이다. 정인승은 전라북도 장수 출신으로 연희전문학교의 수재로 미국 유학의 길을 단념하고 부임한 인물이었다. 그는 수업 시간에 은밀히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상의하기도 하였다.

이병학은 일본체육전문학교 출신으로 재학 시절 평양축구단을 인솔하고 서울에 원정하는 등 솜씨를 보여 주었고, 고창고보에 덴마크 국민 보건 체조를 보급한 사람이다. 광복 후에는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건국 후 최초의 올림픽이었던 런던 올림픽 대회 때 한국 대표 선수 단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5. 전주신흥학교와 통합

고창고보 성립 발전 과정에서 특기할 것은 1934년 전주신흥학교 전 교사와 학생의 전입 사건이다. 전주신흥학교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자 폐교를 당하였다. 그리하여 1934년 9월 25일 전교생과 교사는 일체의 학교 비품까지 옮기며 고창고보에 통합하였다. 신흥학교 교사와 전교생이 고창으로 오던 그날은 고창고보의 교사와 전교생이 길 양쪽에 도영하여 박수로 환영했다.

고창고보는 폐교를 당한 신흥학교 전체의 학생과 교사를 포용했음은 물론 전국 어느 학교에서나 사상운동으로 퇴교를 당한 학생을 받아 주기도 하였다. 본교 13회 졸업생 정범석[국민대학교 총장 역임]도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일제 식민지 교육 정책에 반대하여 동맹 휴학을 시도하다가 구속되어 퇴학을 당하자 바로 고창고보에 전입하였다. 그는 후일 증언하기를 모교 고창고보는 항일 학생이면 기꺼이 받아 주었고, 학교 교육이 올바른 민족 교육이었다. 교사·학생들이 비록 영어 단어나 수학에서 수식을 푸는 데는 다소 서투른 경우가 있다 해도 애국적인 민족정신은 그 어느 학교, 어느 졸업생보다 우수했다고 말하였다.

[김성수와 중앙중학교·보성전문학교]

1. 김성수의 가계

김성수(金性洙)[1891~1955]가 생존했던 시기만큼 민족의 격동기도 없었다. 그는 스스로도 ‘온건한 민족주의자’라고 자처하고 있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문화적 민족운동에 헌신하여 일제 침략주의와 싸웠다.

김성수의 호는 인촌(仁村), 본관은 울산이다. 그는 1891년(고종 28) 10월 21일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 인촌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호가 ‘인촌’인 것은 마을 이름에 따른 것이다.

인촌울산김씨의 후예로 호남의 성리학을 형성케 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의 13대손이다. 인촌의 조부인 김요협(金堯俠)[1740~1818]은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에서 살았으나 인촌마을로 이사 온 것은 180여 년 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남달리 비범할 뿐만 아니라 지·덕을 겸비한 선비였다고 한다. 그가 인촌마을로 이사해 온 것은 바로 그의 처가인 연일정씨의 본토였기 때문이다. 고창에서 인촌의 가정 배경을 이룬 것은 이로부터 시작된다. 김요협은 원래 덕인인 데다가 그의 출중한 학문은 당시 전라 관아에까지 알려져 현감이 조정에 상소하여 마침내 ‘진안 군수’라는 어명을 받아 치사(致仕)하기에 이르렀고, 이로써 그의 관직 생활도 열리게 되었다. 평소 검소·청렴·강직이 생활 신조였던 그는 국록을 받으면 본가에 보내 토지를 사게 했고, 매년 매토하여 그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할 무렵의 말년에는 이미 수천 석을 헤아리는 부자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김요협의 일가가 대부호로서 터전을 쌓은 것은 그의 아들인 기중(祺中)과 경중(暻中)의 형제 때부터였다. 이들은 선대의 유산을 양분하여 그 유산을 알뜰히 가꾸어 경중은 1만석, 기중은 6~7만석의 부호를 이루었다. 이러한 집안의 경제적 배경이 훗날 인촌과 그의 동생 수당 김연수(金秊洙)의 사업 토대가 되었다.

2. 인촌의 교육

인촌은 서당에서 수학하다가 6세가 되던 1896년에 그의 장인 고정주가 세운 창평의숙(昌平義塾)[창평소학교 전신]에 들어가 영어, 일어, 산수 등 신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1897년에는 내소사(來蘇寺) 청년암(靑年庵)에 들어가 면학을 계속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고하 송진우(宋鎭宇)와 새로 알게 된 근촌(芹村) 백관수(白寬洙) 등과 면학하며 당시 민족의 위기에 처한 상황 하에서 장래를 걱정하며 입지(立志)의 큰 뜻을 키워 나갔다.

1898년 10월 동경 유학의 길에 오른 인촌은 금성중학(錦城中學) 5년에 편입하였고, 1910년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하였으니 학문과 민족주의의 민족사상이 모두 여기에서 싹텄다. 인촌이 평생기기 지우[知己之友]로서 민족을 이야기하며 민족을 위하여 힘을 다했던 설산(雪山) 장덕수, 현상윤(玄相允), 최두선(崔斗善), 양원모(梁源模), 박용희(朴用喜), 김준연(金俊淵), 이강연(李康淵), 조만식(曺晩植), 김병로(金炳魯), 정노식(鄭魯湜), 김도연(金度演), 유억겸(兪億兼), 김우영(金宇英), 홍명희(洪命喜) 등은 바로 동경 유학 생활에서 만난 동지들이었다. 그의 조도전대학 재학 시절 키웠던 민족애와 그 당시 만났던 동지들은 훗날 그가 민족 운동을 하는데 정신적·인적 환경을 조성해 주었다.

3. 중앙학교의 인수

인촌이 동경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것은 1914년 7월, 그의 나이 24세였다. 이후 인촌이 공인(公人)으로서 첫 출발하게 된 것은 민족 자각을 위한 민족 교육 사업이었다. 당시 국내 사정을 보면 일제의 무단 정치에 의하여 민족사학과 기독교계 사학은 학교의 경영난이 날로 심해갔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인촌은 근대 민족사학으로 1910년 개교한 중앙학교를 인수함으로써 민족 교육 사업의 문을 열었다.

중앙학교는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흥사단(興士團), 관동학회(關東學會), 호남학회(湖南學會), 교남교육회(橋南敎育會) 등이 통합하여 교육 구국을 부르짖던 우국지사들의 심형이 어린 학교였다. 이렇게 우국지사들이 심혈을 기우려 설립한 중앙학교가 유지 곤란으로 폐교의 위기에 빠지자 이를 개탄한 인촌은 학교 경영을 결심하고 1915년 4월 27일 중앙학회로부터 학교의 인수 절차를 마쳤다. 이때 그의 양부(養父) 김기중(金祺中), 생부(生父) 김경중(金暻中) 형제가 학교 설립자로 되었고, 학교 경영은 인촌이 전담하게 되었으니 인촌 가문의 성의로 마침내 중앙학원(中央學院)은 반석에 놓이게 되었다.

1917년 3월 30일 인촌이 교장으로 취임하여 6월에 현재 중앙중학교의 위치인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桂洞) 1번지[창덕궁길 164] 소재 노백린(盧伯麟)[후에 상해임시정부 군무총장]의 사가를 포함한 땅 4,311평을 매입하였다. 여기에 구 본관 신축에 착공하여 11월 20일 건평 120여 평의 연와(煉瓦) 2층 1동 및 부속 건물을 낙성하고 12월 1일 이전하였다. 그 당시에 이미 9대의 교장과 8회 졸업생 연 인원 318명을 배출하였다.

인촌은 처음에 1개 교사로 있으면서 송진우를 비롯하여 현상윤, 최두선 등 일본 유학생 중 쟁쟁했던 청년 교사를 초빙했다. 그 뒤 1919년 3월 30일 교장은 송진우에게 인계되었다. 그가 재임하던 중 중앙학교 숙직실을 근거지로 독립운동을 펼 조직 방책을 꾸몄고, 그 뜻이 3·1독립운동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4.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의 인수

인촌은 1932년 한민족의 개인이 설립한 사학으로는 최초의 고등 교육 기관이었던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함으로써 결국 꿈은 실현되었고, 이것이 오늘의 명문 사학 고려대학교의 전신이다.

1905년 4월 1일 보성전문학교는 서울의 전동(磚洞)[현재 종로구 수송동] 아어학교(俄語學校) 자리에서 창립되었다. 1911년 1월부터 천도교는 보성전문의 새로운 경영자가 되어 윤익선(尹益善)[법률학 전문과 1회 졸업생]을 교장으로 임명하였고, 1914년 11월 30일에 구 교사를 헐고 목조 건물 2층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3·1운동 후 천도교 경영이 어려워졌다. 1921년 11월 28일 전국에서 이 민간 사학을 돕기 위한 구원의 손길이 모여 58명의 설립자 연명으로 재단법인 설립 신청서를 제출하였고, 1922년 4월 1일자로 ‘재단법인 사립 보성전문학교’의 인가를 받았다. 인촌이 보성전문학교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58명의 설립자 연맹에 속하게 되면서 부터이다. 재단은 설립되었으나 재단의 분규로 3명의 교장이 바뀌었고, 재정난 역시 곤란의 연속이었다.

인촌은 추수 5천 석의 토지를 출연하여 보성전문을 인계·경영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그리고 재단 측의 희망 사항 3가지, 즉 현재 학교 직원의 지위 보장, 교명을 바꾸지 말 것, 교사의 신축을 급속히 실행할 것 등의 조건을 수락하고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였다. 전문학교로 존속하는 한 보전(普專)의 교명을 고수하겠다고 확언했듯이, 광복 후 대학 승격 때까지 그 약속을 지켰다.

인촌의 보성전문 경영 인계는 순조롭게 결정되었다. 새 이사로 김성수, 최두선, 김용무(金用茂) 3인이 선임되고, 감사로는 조동식(趙東植), 한기악(韓基岳) 등이 선임되었다. 이로써 인촌 김성수가 인계한 보성전문은 희망찬 앞날이 열리기 시작했다. 새 재단의 재원은 양부 김기중의 5백 석(石) 전답과 6천여 평의 대지 및 생부 김경중의 5천 석 전답의 기증을 받아 재단법인 중앙학원이 예치하는 형식으로 마련한 것이다. 인촌이 보성전문 인수를 주동하기는 했으나 출자한 것은 아니었다. 이외에도 문재철(文在喆)[무안], 김재종, 장현식[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서도], 현준호[광주] 등 당시 뜻있는 재산가들의 후원이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인촌은 동교를 인수함과 동시에 제10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보성전문 중흥의 기틀을 다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먼저 인촌은 고양군 숭인면 안암리[현 고려대학교 캠퍼스 일대]에 62,000여 평의 부지를 중앙학원의 명의로 매입하였다. 다음 해 9월부터는 총 건평 1,114평의 석조 본관 3층 전물을 착공하여 1년 만에 준공하였다. 인촌의 교육관은 오직 교육을 통해서만이 독립 쟁취라는 정론을 귀일시키고, 거기에서 참다운 애국자와 앞으로의 조선 간선을 길러낸다는 보다 깊은 사명 의식을 폈다. 바로 민족 지도자의 배출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기에 인촌은 이후 광복의 그날까지 약 2년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보성전문 교장을 맡으면서 학교를 키우는 데 힘을 모았다. 제2차 세계대전 말엽 일제의 강압으로 한 때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교명을 개명하기도 했던 보성전문은 광복과 더불어 1945년 8월 15일자로 고려대학교로 새롭게 탄생하였다.

5. 인촌의 민족사업

인촌의 민족 사업은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어서 항시 언동에 조심해야 했다. 온건한 민족주의자로 자처하고 있었지만, 그의 민족의식은 낭중지추(囊中之錐)였다. 경성방직에서 생산되는 최초의 제품에 태극성(太極星)이라는 상표를 붙이게 했고, 보성전문학교의 본관을 지을 때 그 후문 기둥에 태극의 모양을 보일 듯 말 듯 하게 새겨 놓은 것 등은 그 일단이라고 할 것이다.

1919년 10월 5일 인촌에 의해 창립된 경성방직은 우리 민족의 손으로 세운 근대화된 첫 기업이라는 데 의미가 있음은 물론 민족 자본을 모으기 위한 1인 1주 모집운동을 벌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인촌은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민족 자본의 형성을 위한 1인 1주 매입의 참여를 부탁하며 국산품의 애용과 일화(日貨) 배척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주식 1주의 1회 불입금은 12원 50전으로, 당시 백미 2가마에 상당했다. 공모된 주만 해도 16,210주인 것을 감안하면 그 당시 민족의 참여도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때마침 불어 닥친 경제 불황과 면화, 면사, 면포 등 3품[일종의 증권처럼 거래되었음]의 투자 실패로 자본금을 축냈다. 결국 인촌이 양부를 설득하여 마지막 남은 땅문서를 은행에 저당 잡혀 8만원을 융자 받아 시설을 마칠 수가 있었다.

1923년 4월, 회사 창립 3년 반 만에 경성방직 영등포공장에서는 첫 제품으로 광목을 생산하고 상표로 태극성표를 부착토록 했던 바, 이는 바로 태극기를 제품에 표시하여 자주 독립 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배려에서였다. 경성방직은 민족의 자본, 민족의 기술을 표방하면서 조선인만을 채용할 정도로 강렬한 민족적 긍지를 보여줌으로써 일제에 억압된 민족의 가슴에 보람을 심어 주기도 하였다.

1955년 6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인촌은 그의 생애가 천부적인 부호였음에도 불구하고 검소와 근면으로 일관하여 일제 36년의 억압 하에서 거대한 민족 자본을 형성하였다. 안으로는 육영 사업, 밖으로는 애국자들에게 젖줄처럼 독립 자금을 대주었고, 광복 후에는 민주 헌정의 새로운 전통을 구축하여 민주주의 창립에 보다 많은 업적을 남긴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독립선언, 민족 언론의 수호자]

근촌 백관수[1889~1951]는 주권 상실기에는 민족의 독립 운동에 투쟁했으며, 광복 이후에는 민주·민권을 바탕으로 민주 헌정의 기반을 다지는데 헌신한 민족의 지도자요 선각자의 일인이었다.

1. 근촌의 가계

근촌은 1889년(고종 26) 1월 28일 고창군 성내면 생근리(生芹里)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호도 고향 마을인 생근리에서 딴 것이다. 근촌선조 때 유명한 선비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1497~1579]의 10대손으로 당시 그 근방의 부농이었던 백도진(白道鎭)과 고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근촌은 6세에 간재(艮齋) 문하에 들어갔고, 13세에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능통했다고 했다. 인촌과는 서당의 친구였고, 인촌을 통해 청년암에서 송진우를 만났다. 1907년 여름 근촌인촌은 부안 내소사의 청년암에 들어갔고, 뒤늦게 고하가 들어와 인촌의 소개로 고하와 알게 되었다. 이들의 청년암 생활은 세 사람의 민족 운동의 전개에 있어서 퍽 의미 있는 만남이었다.

이후 이들이 금호학교에서 수학한 기간은 2년 남짓 했지만 근대 교육 과정에 따른 교육으로 근대적 학문에 대한 눈을 뜨게 되었다. 이어 인촌고하는 동경 유학의 길에 올랐으나 근촌만은 부모의 반대로 동경 유학을 뒤로 미룬 채 상경하여 경성법률전수학교에 들어가 수학한 후 1915년 동교를 졸업하자마자 YMCA에 들어가 청년지도자로 사회에 첫발을 디뎠다. 그는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1850~1927]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으면서 청년들을 지도했다. 민중 계몽과 애국 사상의 고취, 사회봉사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2. 근촌과 독립 선언

1917년 봄, 근촌은 동경 유학의 길에 올라 29세의 만학도로 명치대 법과에 입학하였다. 근촌은 유학생들의 친목 단체인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그 결과 근촌이 주도한 조선유학생 학우회는 ‘2·8독립 선언’을 낳게 하였으며, 이것을 2·8사건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1919년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여 동년 2월 8일 도쿄에 있는 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독립 선언서를 만방에 발표한 한국 독립 운동사상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조선청년독립단의 단장인 근촌최팔용, 송계학, 김도연, 나용균, 이광수, 장덕수 등과 긴밀히 회동, 당시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원칙에 입각한 약소민족의 독립 주장에 고무되어 조직한 재일 유학생들이 총망라된 독립 운동 단체였다. 근촌은 2·8독립 선언 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1년의 옥고를 치렀다.

3. 근촌과 민족 언론

근촌은 1921년 명치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1924년 근촌은 『조선일보』 상무이사 겸 편집인으로 입사하면서 공적인 사회 활동의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이 때 그의 나이 36세였다. 그는 항상 기자들이나 사원들에게 눈앞에 보이는 작은 일에 집착하기 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내다보는 긴 안목을 길러야 한다고 당부하면서 민족의식을 강조하였다. 『조선일보』의 생활은 1928년 1월 21일자 「보석 회생의 지연」이 문제가 되어 필화를 입게 되었다. 당시 사설의 요지는 피의자의 인권과 처우 문제 그리고 공정한 재판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근촌은 주필이었던 안재홍과 함께 구속 기소되어 벌금 1백 원의 선고를 받았으며, 안재홍은 금고 4월의 선고를 받았다. 『조선일보』는 1년 4개월간 정간 처분을 받아 신문 발행도 중단되고 근촌도 이로써 인연을 끊게 되었다.

근촌이 또 다시 언론계에 등장한 것은 1937년 5월 31일 『동아일보』의 제7대 사장으로 취임한 것에서 비롯된다. 탁월한 식견과 넓은 안목으로 세계를 통찰하는 그의 애국관과 인생관이 사장으로 발탁하게 된 이유였다.

그 당시 『동아일보』는 손기정 선수의 러닝셔츠 앞가슴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무기 정간 처분을 받았다가 9개월 만에 해제되어 근촌이 취임한 3일 후인 6월 3일로 복간되었던 상황이었다. 또한 그 무렵 한반도에 대한 일제의 강압적 통치는 극에 달하고 있었고, 내선일체라는 구호 하에 이른바 대동아전쟁 도발을 앞두고 핍박을 더해 가고 있었다. 1939년 6월 말에는 「편집에 관한 희망 및 주의 사항」을 제정하여 일제는 신문의 자구 하나까지 간섭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갖은 수법을 동원하여 언론을 탄압하면서 조선총독부는 1940년 6월초 『동아일보』에 대하여 이른바 파지 유출에 따른 경리 부정 사건을 조작하여 경리장부 압수와 임정엽 상무의 구속 등 강압적인 조치로 나왔다. 그러나 조사 결과 경리 부정이란 있을 수 없었다. 이보다 앞서 근촌은 5월 초순경 고하 송진우와 회사 간부들과 같이 명륜동의 백운장이라는 음식점에서 회식을 한 일이 있었다. 이것을 비밀 결사라고 트집을 잡아 다시 입건하고 사장인 근촌을 구속하였다.

근촌이 구속된 10일 후 경찰은 송진우를 통해 『동아일보』가 자진 폐간만 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고 귀띔하여 주었다. 이로 보면 근촌의 석방은 『동아일보』의 자진 폐간을 상관시키려 했던 술책임을 읽을 수 있다. 이에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동아일보』는 종로경찰서 수사과장실에서 약식 중역 회의를 열고 사태 수습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근촌은 단호하게 거절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할 수 없이 중역 회의는 임정엽 상무를 발행 겸 편집인으로 명의를 바꾸어 폐간계를 제출했으니 1940년 8월 10일자였다. 그리하여 『동아일보』는 지령 6819호로 민족 대변지로서의 역할을 마감하였다.

근촌은 풀려난 뒤 고향인 전라북도 고창으로 낙향하여 은둔하였다. 은둔 생활 중 창씨개명을 거부하였고, 외부 출입을 삼가하며, 해방되던 해까지 5년 동안 시작(詩作)과 붓글씨로 소일하며 침묵하였다. 광복 직후에는 김병로 등과 함께 좌우익의 타협을 모색했으나 결렬되었다. 8월 16일 원세훈(元世勳)·이인(李仁)·조병옥·나용균 등 민족주의 진영 일부 인사들과 조선민족당을 발기·창당하였다. 여운형으로부터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 제의가 들어왔으나 거절했다.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건국준비위원회와 송진우 사이를 절충하려 노력하였으나 실패했다.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발기인의 한사람이 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헌법 기초위원으로서 초대 법제 사법위원장·헌법 제정의원·정부 조직법 기초위원 등을 지냈다. 1950년 6월 6·25전쟁 때 북한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연행되어 납북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울******* 1. 김성수의 가계
--- 인촌은 울산김씨의 후예로 호남의 성리학을 형성케 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의 [[13대손]]이다.
  • 답변
  • 디지털고창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보내주신 내용을 확인하여 수정하였습니다.
2016.12.27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