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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고등보통학교 항일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492
한자 高敞高等普通學敎抗日運動
영어음역 Gochang Godeung Botong Hakgyo Hangil Undong
영어의미역 Gochang High General School Anti-Japanese Movement
이칭/별칭 고창고보 항일 운동,고창고보 학생운동,고창고보학생 맹휴사건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신순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항일 학생 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27년 11월 3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30년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고창고등보통학교 지도보기
관련인물/단체 나가니시|박택렬|김한주|윤욱하|윤정하|윤창하|유일석|유금동(柳今童)|이재천(李載千)|이재남(李載男)|윤선호(尹璿鎬)|서봉열(徐奉烈)|박우(朴羽)|이자록(李子鹿)|진기용(陣琪用)|조순옥(趙順玉)|주태엽(朱泰燁)|서정주(徐廷柱)|임익생(林益生)|김기갑(金基甲)|양회영(梁會英)|조호종(趙昊宗)|방규혁(房奎赫)|오흥탁(吳興鐸)|이영기(李永基)|이교옥(李敎鈺)

[정의]

1927년~1930년 고창 지역의 고창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일으킨 항일 학생 운동.

[개설]

고창고등보통학교 항일 운동에는 독서회 사건과 사회주의 유형의 S당 사건, 일본인 교원 배척 사건, 6·10만세운동 사건 등이 있다. 일본인 교원 배척 사건은 일본인 교사의 조선인에 대한 민족 차별 및 교수의 무능력에서 비롯되었다. 독서회 사건은 일제의 황민화 정책의 반발에서 비롯되었는데, 결사 활동의 성격을 띤 지하 조직으로 무엇보다 항일 의식을 고취하는 계기가 되었다. S당 사건은 당시 유행하던 사회주의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

[역사적 배경]

고창고등보통학교는 3·1운동의 민족정신을 승계한 교육 전당으로서 ‘지성, 근로, 실천의 전인 교육’을 바탕으로 한 교훈을 통해 민족정신을 길러 냈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한국 역사와 한글을 틈나는 대로 가르쳐 8·15광복 직후 국사와 국어 교사는 고창고등보통학교 출신이 도맡아 과도기의 교육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고창고등보통학교의 항일 운동은 1920년대 초에는 지성인의 합류 또는 지엽적인 저항으로 출발하여 무자격 교사의 배척 동맹 휴학에서 자치 주장 맹휴 등으로 확산되다가 6·10만세 사건과 광주학생 항일 운동 등 192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일제의 엄중한 검속에 대응하기 위해 비밀 결사의 지하 운동으로 투쟁 형태가 크게 변모되었다. 내적으로는 사상운동에 이르기까지 형태도 다양하였다.

당시 교육 환경은 일제의 침략이 깊어짐에 따라 점차 열악해졌는데, 일제의 황민화(皇民化) 교육 정책의 소산에서 나온 것이다. 이 같은 식민 정책의 기미를 알아차린 대일 항쟁으로서 학생 운동의 방향 설정도 차츰 무모한 대결 의식이나 동맹 휴학을 지양하고 결사(結社) 활동의 성격을 띠게 되면서 점차 지하 조직으로 잠행화(潛行化)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 활동 양상도 소수 정예화되었고 적극적인 행동 방식을 취하게 되었다.

[경과]

고창고등보통학교 항일 운동에서 일본인 교원 배척 사건은 일본인 교사 나가니시의 행태에서 비롯되었다. 1923년 10월 수학여행을 마치고 귀교한 이튿날부터 수업을 거부하는 동맹을 맺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나가니시는 민족 차별을 심하게 하여 학생들 모두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일본식 영어 발음과 거칠고 이해할 수 없는 교수법은 학생들의 수업 거부를 단행하게 하였다.

1927년 11월 3일 2학년생들이 교장에게 일본인 교원 배척 외 3개 조건과 5개의 요구를 담은 진정서를 제출하고 이날부터 동맹 휴학을 단행하였다. 학교 당국에서는 6일 오후 6시경 2학년 학생 모두를 무기정학에 처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동맹 휴학을 계속하였다. 당국에서는 11월 9일 주모자 4명에게 퇴학 처분을 내렸다. 그러자 11월 10일 오후 4시경 1학년생들이 동맹 휴학에 참여한 2학년 모두 희생 없이 전부 등교 시켜 줄 것과 사과하고 등교한 7명에게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교수하지 말 것 등 두 가지 요구 조건을 제출하고 이날부터 동정 동맹 휴학을 단행하였다.

이에 3~5학년 학급도 이날 밤 회의를 하여 학생들의 동맹 휴학에 대해 학교 당국이 2학년 4명에게 퇴학 처분을 한 것은 지나치게 가혹하다며 1학년의 요구 조건과 함께 학교 당국에 진정하고 요구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는 각 학급을 통하여 최후 태도를 정하기로 하였다. 1928년 10월 16일 2~3학년 학생 전원이 교원 배척과 학우회 전권을 학생 측에 달라는 것 등 23개조의 요구 사항을 제출하고 그날부터 동맹 휴학을 결행하자 학교 당국은 이들 학생들에게 등교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학생들은 이에 불응하여 등교하지 않았다.

이에 11월 18일 오전 학교 당국은 주모자 4학년 3명, 3학년 3명, 2학년 5명 등 11명을 퇴학 처분함과 동시에 동맹 휴학에 가담한 학생 58명에게 무기정학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반발을 두려워한 학교 당국은 일부 시말서를 받고 방면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등교 가능성은 희박하였고 점차 문제가 더욱 확대되자 경찰에서는 또다시 선동한다는 혐의로 시말서를 받고 석방한 학생들에 대하여 다시 검속하였다.

또한 학교 당국에서는 제2차로 주모자 2~3명을 추가 처분하려고 하면서 사태가 심각한 국면에 처하였다. 학생들이 강경한 자세를 굽히지 않고 동맹 휴학을 계속하자 학교 당국은 11월 22일 오후 1시경 제2차 주모자라고 인정되는 3학년 2명에게 퇴학 처분을 내렸다. 그중 1명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1명은 경찰에 즉시 검속되었다. 12월 13일 경찰은 동맹 휴학 사건의 주모자로 퇴학을 당하여 고향에 가 있던 박택렬[함경남도 흥원군 용원면 연하리]과 김한주[함경남도 홍원군 경포면 좌상리]를 홍원군에서 검거하여 14일 오후 6시 전진역(前津驛)발 남행 열차로 고창으로 압송하였다.

1929년 6월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구성된 독서회 중앙본부는 급속도로 호남 각 학교로 확산되었다. 고창고등보통학교에서도 윤욱하·윤정하·윤창하 등이 연결되어 극비리에 결사 조직이 만들어졌다. 조직원은 유일석(柳日錫)[고창읍 월곡유금동(柳今童)[고수면 내창]·이재천(李載千)[성내면 신성이재남(李載男)[성내면 신성]·윤선호(尹璿鎬)·서봉열(徐奉烈)·박우(朴羽)·이자록(李子鹿)·진기용(陣琪用)·조순옥(趙順玉)·주태엽(朱泰燁)[고창읍 신람]·서정주(徐廷柱)[고창읍 월곡]·임익생(林益生)[나주 동강]·김기갑(金基甲)[김제군 수류면]·윤욱하[해남군]·양회영(梁會英)[화순군 도곡면]·조호종(趙昊宗)[김제군]·방규혁(房奎赫)[익산군 웅포]·오흥탁(吳興鐸)[고창읍]·이영기(李永基)[정읍 소성]·이교옥(李敎鈺)[완주군 고산] 등이었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정기적으로 독서 감상회를 여는 등 순수한 학생 모임이지만, 내적으로는 광주의 독서회 중앙본부와 연계하여 광주학생 항일 운동의 투쟁 의식을 승계하는 비밀 결사 활동이 주 임무였다. 고창경찰서 내부에서도 어느 정도 그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으나 학생 활동을 조사할 수가 없었다. 독서회는 1930년대 후반기까지 지하 조직으로 지속되었다.

광주학생 항일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전라북도에서도 1930년 1월 20일 밤 전주 시내에 격문이 뿌려지고 신흥학교를 비롯하여 기전여학교·전주여자고등학교·이리농림학교 등지에서 시위와 동맹 휴학이 잇달았다. 고창고등보통학교에서는 1930년 1월 22일 학교 당국에서 학생들의 운동과 관련하여 무기 휴학을 전개하려던 학교 학생 20여 명이 피검되었다.

그리고 1929년 무장면 출신으로 공산당 요원으로 크게 활약하고 있었던 김명환(金明桓)에 의해 사회주의 노선의 비밀 결사 S당 조직이 발기되었다. 졸업반 학생인 배종인(裵宗仁)[고창읍]과 정병규(丁炳圭)[김제군 공덕] 등의 주동으로 비밀리에 회원을 모집하고 여름방학 때 조직을 결성하여 사회주의 노선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좌경화되어 가던 학생 운동으로, 1930년 2월 12일 비밀 결사 S당 사건이 발생하였다.

[결과]

당국에서는 일본인 교원 배척 항일 운동과 관련하여 11월 9일에 주모자 4명에게 퇴학 처분을 하였고, 독서회 사건과 관련하여서는 1929년 6월 15일 동맹 휴학 중인 학생들의 집을 수색하던 중 윤욱하의 집에서 비밀 결사의 초안이 발견하여 학생 4명을 검거하였다. 1930년 6월 2일 독서회 및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검거되어 예심 중에 있던 유금동이 전주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학생 운동과 관련해서는 무기정학과 근신 처분이 각각 11명과 10명에게 내려졌다. 한편 피검된 학생 중 5명은 송치되고 나머지는 석방되었으며, 4명은 구류 처분을 받은 뒤 동년 3월 1일에 출옥하였다. 그리고 1930년 1월 21일 광주학생 항일 운동 사건의 동정 궐기 시위는 사전에 발각되어 2월 13일 주동자 11명이 검거되었다. 이로써 S당 사건은 와해되고 주동자인 정병규는 퇴학당하였다.

[의의와 평가]

고창고등보통학교는 1918년 설립된 민족 사학으로 일제 강점기에 ‘북오산 남고창’으로 불릴 만큼 교육적 열의와 민족의식이 투철하였다. 옳지 못한 교원에 대한 배척·항일 운동인 독서회 활동·광주학생 항일 운동 동정 궐기 시위·사회주의 비밀결사 조직 등 항일학생운동을 전개하였다. 초기의 학생 운동은 무모한 대결 구도나 동맹 휴학이 주를 이루었지만, 점차 결사 활동의 성격을 띠면서 조직화되었다. 곧 소수 정예화된 항일 운동의 성격을 지양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던 항일 학생 운동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깊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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