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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1197
한자 道東祠
영어음역 Dodongsa
영어의미역 Dodongsa Shrine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 566-1[가평1길 59]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최범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당
양식 맞배지붕
건립시기/일시 1928년연표보기
정면칸수 3칸
측면칸수 2칸
소재지 주소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 566-1[가평1길 59]지도보기
문화재 지정번호 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3호
문화재 지정일 2004년 6월 8일연표보기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에 있는 최익현(崔益鉉), 고석진(高石鎭), 고예진(高禮鎭), 고용진(高龍鎭)을 기리는 일제 강점기 사당.

[개설]

도동사는 원래 고석진(高石鎭)이 후학을 가르치던 방호정사(方壺精舍)가 있던 곳인데, 1928년 6월에 후학들이 방호정사의 안쪽에 사우(祠宇)를 지어 최익현(崔益鉉)과 독립의군부 참모장을 지낸 고석진(高石鎭), 의병장 고예진(高禮鎭), 고용진(高龍鎭) 등 4인의 위패를 봉안하여 향사하고 있다.

최익현은 경기도 포천 출생으로, 1833년(순조 33)에 출생하였고, 자는 찬겸(贊謙)이며 호는 면암(勉庵)이다. 본관은 경주이고 최대(崔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서 초명(初名)을 기남(奇男)이라고 하였다. 14세 때에 부친의 명에 따라 성리학의 거두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 되어, 우국애민(憂國愛民)적인 위정척사 사상을 이어받아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춘추대의론으로 승화, 발전시켜 자주적인 민족 사상으로 체계화하였다.

23세 때에 명경과(明經科)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재임 중 꾸준히 부정부패와 구국 항일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였다. 흥선대원군을 비판했던 최익현은 동부승지로 기용되어 반 흥선대원군파의 첨병에 서게 된다. 서원을 철폐한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맹렬히 비판하는 등의 공격을 통해 결국 흥선대원군을 실각시켰다.

최익현은 외국과의 통상을 논의하기 시작한 민씨 정권과도 마찰을 빚었다. 일본과의 통상조약 체결을 극렬 반대하다가 흑산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이후 통상 확대와 외세의 유입이 계속되면서 최익현은 결사 저항하는 위정척사론의 거두로 활동하게 된다. 1894년(고종 31) 발생한 동학농민혁명과 그 해 친일 정권 성립과 함께 단행된 갑오개혁에 크게 반발했고, 이듬해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을 조직했다가 체포되었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 체결을 계기로 최익현은 공개적으로 의병을 모집하였다. 임병찬, 임락 등과 함께 전라북도 정읍에서 거병하였으나, 곧 관군에게 패하여 체포되었고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단식을 하는 등 끝까지 저항하다가 4개월 만에 사망했다.

고석진은 개항기 유학자이자 의사(義士)로, 자는 청여(淸汝), 호는 수남(秀南),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1856년(철종 7)에 신림면 가평리에서 출생하였다. 고석진은 일찍부터 타고난 재능으로 문예를 성취하였고 의협심이 강하여 충의의 대절(大節)이 있었다. 을사조약이 성립되자 스승의 단식결사(斷食決死) 소식을 듣고 장귀동(藏尯洞)에 달려가 지사를 규합하여 창의토적(倡義討賊)할 것을 모의하였다. 그러다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고종의 밀칙(密勅)을 받아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를 조직하여 참모총장(參謀總長)으로 활약하였고, 1919년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을 보낸 사건인 파리장서운동에 동참하여 제2인으로 서명하였다. 광복 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고예진은 개항기의 유학자이자 의사(義士)로, 자는 계문(季文), 호는 송천(松川), 본관은 장흥이며, 1875년(고종 12)에 흥덕면 송암리에서 출생하였다. 최익현의 문인으로 1906년(고종 43)에 최익현이 창의할 때 족형인 고석진과 함께 의거에 참여해 격문을 인쇄하여 8도에 포고하고, 많은 무기와 군량을 모아서 옥천으로 운송하였다. 1914년 독립의군부 서기관(書記官)이 되어 활약하였으며, 항일운동에 진력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효성 또한 지극하여 인근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광복 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고용진(高龍鎭)의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호는 송재(松齋), 이명(異名)은 고운서(高雲瑞)이다. 1850년 10월 1일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에서 고시필(高時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치]

도동사는 가평마을 윗길을 따라서 동쪽 끝으로 나아가 남쪽으로 돌아 내려가면 보인다. 마을 동쪽에서 들어가면 아랫길 첫머리에 위치하고 있다.

[변천]

일제 강점기에는 치안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향사(享祀)가 금지되었다가 1947년에 와서야 복향(復享)하였다.

[형태]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외삼문 안에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방호정사가 위치하며, 그 뒤에 다시 외삼문이 있고, 그 뒤편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을 한 도동사가 배치되어 있다.

[현황]

2004년 6월 8일 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3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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