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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947
한자 宋泰會
영어음역 Song Taehoe
이칭/별칭 염재(念齋),평숙(平叔),염재거사(念齋居士),염재옹(念齋翁)
분야 역사/근현대,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성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교육자|서예가
출신지 전라남도 화순군 동북면 사평리
성별
생년 1872년연표보기
몰년 1942년연표보기
본관 여산

[정의]

일제 강점기 고창 지역에서 활동한 교육자이자 서예가.

[개설]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자는 평숙(平叔), 호는 염재(念齋)이다. 염재거사(念齋居士), 또는 염재옹(念齋翁)으로도 불렸다. 1872년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동북면 사평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송긍면(宋兢勉)이다.

[활동사항]

송태회는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써서 6세 때 쓴 「녹괴서실(綠槐書室)」이란 글씨를 중국 원세개(袁世凱)가 보고 천동(天童)이라 칭찬했다고 전한다. 10세 때 한산(韓山) 민종묵(閔鍾默)이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따라갔는데, 연경의 서예가 석범(石梵) 진연서(陳衍庶)가 그의 글씨 끝에 “송(宋)나라 4대가의 필력을 얻어 진인(晉人)의 풍치가 있다.”고 써 주었다.

숙부 송수면(宋修勉)에게 서화를 익히고 조소아(趙小雅)에게 서법과 문장을 습득하여 16세에 동몽진사가 되고, 29세에 박사(博士) 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후 시문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시를 지으면 언제나 장원을 하여 당시에 시서화삼절(詩書畵三絶)로 칭했다. 원세개가 귀국할 때 성균 진사 3인에 포함되어 전송사로 배행했는데, 연경에 들어가 그곳 명사와 문묵(文墨)을 연마하고 1907년에 돌아왔다.

1909년부터 1910년까지 『대한매일신보』 기자로 활동했으며, 국권 피탈 이후는 육영(育英)에 뜻을 품고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1920년 고창 지역에 세워진 오산학교에 한문 교사로 초빙되어 교사로 재직하면서 조선어를 쓰지 못하게 하는 일본의 정책에 맞서 한글 교육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앞장섰다. 또한 국사 교육에도 관심을 가지고 조선어와 한문 습자를 교육하는 등 민족 사상을 고취하였다. 1922년 사돈으로 교장 대리로 있던 양태승(梁泰承)과 함께 지역 유지들을 설득하여 고창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염재유고(念齋遺稿)』가 있다. 서예와 그림에도 뛰어나서, 전라남도 순천의 송광사 성보박물관에 「일지매」 병풍이 있으며, 전북도립미술관에 「금강산전도」가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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