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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덕붕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744
한자 高德鵬
영어음역 Go Deokbung
이칭/별칭 남익(南翊),여곡(麗谷)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제하리 고려실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기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병장
출신지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제하리 고려실지도보기
성별
생년 1552년연표보기
몰년 1626년연표보기
본관 장흥
대표관직 승정원좌승지

[정의]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의병장.

[가계]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남익(南翊), 호는 여곡(麗谷). 아버지는 참봉 고응진(高應軫)이다.

[활동사항]

고덕붕(高德鵬)은 41세 때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 격문을 작성하여 동지를 규합한 뒤 의병장 고경명(高敬命) 진영이 있는 금산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때 고경명은 이미 순절한 뒤여서 고향으로 돌아와서 채홍국(蔡弘國)흥덕을 중심으로 일어난 92명의 창의 동맹 일원으로 가담하여 남당고개에서 피를 나누어 마시고 의병을 일으킬 것을 다짐한 이른바 ‘삽혈동맹(歃血同盟)’을 맺고 의병소를 차릴 때 맹주장(盟主將)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고덕붕은 의병들을 거느리고 담양, 곡성, 순천의 쌍암·주암, 남원, 순창의 적벽강으로 옮겨 싸우면서 11월 18일에 개선하였다.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1월 명나라 군(軍)의 지원으로 왜병이 물러가자 이들 3백여 명의 의열들은 향리로 돌아와 각기 생업에 종사하였다. 이들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남당의 회맹단(會盟壇)에서 다시 봉기하여 흥덕 배풍산까지 쳐들어 온 왜군을 맞아 줄포의 장등(長嶝)까지 적을 몰아냈으나 부안 호벌치(胡伐峙) 싸움에서 져서 대부분 순절하고 말았다. 다행히 고덕붕은 살아남았다가 1626년(인조 4) 향년 75세로 죽었다.

[묘소]

묘소는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893년(고종 30) 나라에서 승정원좌승지를 증직하였다. 유림의 추천으로 모충사(募忠祠)에서 향사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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