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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팔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722
한자 金八起
영어음역 Gim Palgi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주명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거짓 고변 희생자
출신지 전라북도 고창군
성별

[정의]

조선 후기 고창 출신의 거짓 고변 희생자.

[활동사항]

1733년(영조 9) 11월 4일 포도대장 신광하(申光夏)가 괘서사건에 대해 상소하였다. 신광하가 말하기를, “창원 사람 김계보(金繼寶)가 금년 8월 16일에 창평 땅에 갔는데, 태인 사람 홍구채(洪九采), 정읍 사람 김명신(金命信)·서정구(徐鼎九), 흥덕 사람 김팔기(金八起)·정제인(鄭齊仁), 부안 사람 김남역(金南繹) 등이 고만령(高萬齡)의 집에 몰래 모여 바깥문을 굳게 닫고 모의하였습니다. 그가 담을 넘어 들어가서 가만히 들어 보니, 홍구채와 김팔기가 말하기를 ‘남원과 순천 송광사에 두 차례 괘서했지만 끝내 그 효과가 없었으니, 내년 봄을 기다렸다가 곳곳에 방(榜)을 건 뒤에 장차 당(黨)을 모아 거사(擧事)하자.’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국문하라고 하였다.

이에 11월 15일 김남역, 고만령, 김계보를 추국(推鞫)한 결과, 이들과 김계보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것이 판명되었다. 거기에다 8월 16일 창평 고만령의 집에 모여 괘서에 관해 수작(酬酌)하였다고 했으나, 그날 집주인 고만령은 외지에 출타한 것이 확인되었다. 결국 김계보는 네 번에 걸친 추국으로 죽음을 맞이했고, 김팔기는 정제인·김남역·고만령 등과 함께 무죄 방면되었다.

영조가 즉위한 이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었다. 이는 정권에서 쫓겨난 소론이 영조에 저항하여 일으킨 난이다. 비록 이인좌의 난은 진압되었으나 소론은 영조와 노론의 대신들에 대하여 여전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 영조는 이러한 불만 요소를 척결하기 위해 탕평책을 썼으나 아직은 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워 각지에서 종종 괘서 사건이 일어났다. 김계보의 무고는 영조와 노론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다행히 김팔기는 무고함이 밝혀졌지만, 이 사건을 통해 영조 초기 노론과 소론의 갈등으로 인해 국가가 안정되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후기 고창 흥덕현에 살았던 사족 김팔기는, 1733년 김계보가 거짓으로 홍구채·김명신·서정구 등과 몰래 난을 일으키려 모의했다고 고발하여 잡혀 가 추국을 당했으나 죄가 없음이 밝혀져 무죄 방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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