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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617
한자 金石文
영어음역 Geumseongmun
영어의미역 Epigraph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백원철

[정의]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 전해지는 금속이나 돌에 새겨진 문자.

[개설]

금석문은 보통 금속이나 돌에 새겨진 문자를 뜻하며, 넓게는 나무·토기·그릇·직물·전돌·기와 등에 기록된 문자를 포괄하여 부르기도 한다. 역사 연구에 있어 고문서 등의 기록과 함께 특히 주목되는 자료이다. 고창 지역의 금석문은 공적비와 묘비 중심으로 조사되었고, 그밖에 효열비와 각종의 기념비가 추가로 확인된다.

특히 공적비는 조선 시대 고창군이 3개 고을이었기에 각각 당시의 현치(縣治)에 모아져 세워져 있다. 이들에 대한 공식적인 조사는 1984년 전북대학교 박물관조사팀에서 수행하여 『고창지방 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高敞地方文化財地表調査報告書)』가 작성된 바 있고, 그 외에 향토사학자에 의해 약간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고창의 금석문을 분류하면 크게 5가지로 나눌 수 있는 바, 공덕비, 묘비, 효열비, 기념비, 기타 등이다.

[공덕비]

공덕비는 대부분 3개 현[고창, 무장, 흥덕]의 수령과 이 지역을 관할한 관찰사 등의 선정비가 주축을 이루고, 근·현대에서는 면 단위 관료와 지역 유지의 공로를 기록한 공적비가 많이 세워졌다. 근래 지역의 개발에 따라 한 곳에 모아 세워졌는데 고창읍성 밑에 18기[고창읍성 비석군], 무장읍성 안에 14기[무장읍성 비석군], 흥덕면 교운리에 25기[교운리 비석군], 대산면 춘산리에 10기[춘산리 비석군]가 있으며, 그밖에 공음면 군유리에 1기, 신림면 외화리에 1기, 성송면 하고리에 1기 등 총 70기에 이른다.

고창읍성 내 척화비 비석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아니하면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우리는 만 년 동안 길이 자손에게 경계해야 한다. 병인년에 작해서 신미년에 세웠다. 임신 오월에 현감 이동석이 교서를 받들어 세웠다[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戒我萬年子孫丙寅作辛未立上之九年壬申五月日行縣監李東奭奉教立]”이라 음각되어 있다.

고창읍성 비석군에는 ‘현감이항청백비’, ‘관찰사이근호영세불망비’, ‘군수 이기석 애민청덕선정비’, ‘현감 심한영 청덕선정비’, ‘현감 박면하 애민선정비’, ‘현감 한형교 청덕비’, ‘□영석 만세불망비’, ‘현감 홍명일 청백선정비’, ‘현감 왕계□ 영세불망비’, ‘현감 이종응 청덕선정비’, ‘현감 홍우석 애민선정비’, ‘현감 변세의 청덕선정비’, ‘현감 정형기 청백선정비’, ‘고직장 신광흡 유애비’, ‘통정대부 신재효 유애비’, ‘군수 신상우 선정비’, ‘현감 이관복 애민선정비’, ‘순찰사 이서구 영세불망비’ 등의 금석문이 있다.

무장읍성 비석군의 금석문의 제목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남쪽에 있는 고창의 유일한 철비로는 ‘전참봉김영곤선행불망비가’ 있고, 그 옆으로 ‘행군수이창익청덕영세불망비’, ‘현감최효용청덕선정비’, ‘현감정권영영세불망비’, ‘군수이희하청덕애민선정비’, ‘현감오□청덕선정비’, ‘어사심상학만세불망비’, ‘이교인선정비’, ‘현감이수현청덕선정비’, ‘현감임득□청백비’, ‘현감유진오영세불망비’, ‘행현감이찬하애민선정비’, ‘김상운시혜불망비’가 있다.

[묘비]

묘비는 조선 시대와 광복 전에 세워진 것을 대상으로 할 때 5기가 확인된다. 통정대부 이석덕(李錫德)의 묘비는 1780년 고수면 부곡리에, 통정대부 최상운(崔尙雲)의 묘비는 1854년 성송면 하고리에, 통훈대부 강계오(姜繼吳)의 묘비는 1868년 성송면 무송리에, 가선대부 김계성(金繼成)의 묘비는 1900년 대산면 갈마리에, 통정대부 김주택(金周澤)의 묘비는 1912년 대산면 지석리에 각각 세워져 있는 바, 이는 극히 일부만 파악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효열비]

효열비의 범주에 속한 것으로는 모두 4기가 확인된다. 정영손(鄭永孫) 처 김씨의 박유비(剝乳碑)[부안면 오산리, 1789], 정시해(鄭時海) 충효비[성송면 무송리, 1903], 능성구씨 효열비[대산면 광대리, 1908], 표진극(表珍極) 효자 정려비[공음면 칠암리, 1919] 등이다. 이들 중 김씨의 박유비는 여느 효열비와는 다른 특이한 내용이 새겨져 있는 바, 다음과 같다.

조선 정조 때 이 마을 사람 정영손이 병으로 누워 있자, 아내 김씨가 생계를 꾸려 갔다. 하루는 마을 뒤 수광산(水光山)에서 나무를 하였는데 무거워 머리에 일 수가 없던 차에 마침 지나가던 중이 나무를 들어 올려 주면서 드러난 김씨의 유방을 만졌다. 이에 김씨는 몸을 더럽혔다 하여 낫으로 유방을 떼어 버리고 죽었다. 나라에서 그 사실을 듣고 그 집안에 복호(復戶)[조세나 부역을 면제해 주는 일]를 내리고 1789년(정조 13)에 비를 세웠다. 비문에 “젖을 베어내 몸을 깨끗이 하였으니 금과 옥 같은 심장이로다. 이에 그 집에 복호를 내렸으니 비석에 광채가 어리도다.”라고 적혀 있다.

정시해 충효비의 앞면에는 ‘의사정시해공충효비(義士鄭時海公忠孝碑)’라고 크게 쓰여 있으며, 음기에는 ‘계묘사월십일(癸卯四月十日)’이라고 각자되어 있다.

[기념비]

기념비는 매우 다양하여 총 8기가 있다. 비교적 연대가 오래된 것을 들면, 무장면 성내리에 있는 저수지 기공비[1741]가 있으며, 선운사 입구[아산면 삼인리]에 있는 선운사 백파율사비(白坡律師碑)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1858년(철종 9)에 비문을 짓고 쓴 것으로 이름이 있다. 비석의 앞면에는 ‘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라고 되어 있다. 또한 다음과 같은 금석문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근세에 율사(律師)의 한 종파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白坡)만이 이것에 해당할 만하다. 그러므로 율사로 썼다. 대기(大機)와 대용(大用)은 백파가 80년 동안 착수하고 힘을 쏟은 분야이다. 혹자는 기(機), 용(用)을 살(殺), 활(活)로 지리멸렬하게 천착(穿鑿)하기도 하나 이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무릇 평범한 사람들을 상대하여 다스리는 자는 어디에서건 살, 활, 기, 용이 아닌 것이 없으니 비록 『팔만대장경』이라 하더라도 살, 활, 기, 용의 밖으로 벗어나는 것은 한 가지 법도 없다. 다만 사람들이 그 의리를 알지 못하고 망령되이 살, 활, 기, 용을 백파를 구속했던 착상으로 여긴다면 이는 모두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드는 것과 다름없으니 이것이 어찌 백파를 충분히 아는 것이겠는가.

예전에 백파와 더불어 자못 왕복하면서 어려운 문제를 분변한 적이 있었는데, 이는 곳 세상 사람들이 함부로 떠들어 대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오직 백파와 나만이 아는 것이니 비록 온갖 말을 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모두 이해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니, 어찌 율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오게 하여 서로 마주하여 한번 웃을 수 있겠는가.

지금 백파의 비석에 새길 글자를 지음에 만약 대기대용(大機大用)이라는 한 구절을 큰 글씨로 특별히 쓰지 않는다면 백파의 비(碑)로서 부족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써서 설두(薛竇)와 백암(白巖) 여러 문도(門徒)에게 보인다. 다음과 같이 써서 붙인다. ‘가난하기로는 송곳 꽂을 땅도 없었으나 기개는 수미산(須弥山)을 누를 만하였네. 부모 섬기기를 부처 섬기듯 하매 가풍(家風)이 가장 진실하도다. 그 이름 긍선(亘璇)이니 전전(転転)한다 말할 수 없다네. 완당(阮堂) 학사(学士) 김정희가 글을 짓고 글씨를 쓰다 숭정기원후 네 번째 무오년5월 일 건립하다[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我東近無律師一宗惟白坡可以當之故以律師書之大機大用是白坡八十年藉手著力處或有以機用殺活支離穿鑿是大不然凡對治凡夫者無處非殺活機用雖大蔵八萬無一法出於殺活機用之外者特人不知此義妄以殺活機用為白坡拘執着相者是皆蜉蝣撼樹也是烏足以知白坡也昔與白坡頗有往復辨難者即與世人所妄議者大異此個處惟坡與吾知之雖萬般苦口説人皆不解悟者安得再起師來相對一笑也今作白坡碑面字若不大書特書於大機大用一句不足爲白坡碑也書示雪竇白巖諸門徒果老記付 貧無卓錐氣壓圧須彌事親如事佛家風最真實厥名兮亘璇不可説轉轉阮堂學士金正喜撰并書崇禎紀元後四戊午五月日立].”

[기타]

기타의 비로는 1872년(고종 9)에 세워진 고창읍성 내 척화비가 있으며, 효자인 진사 김질(金質)을 향사하는 도암서원(道巖書院)과 관련된 하마비[17세기 초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가 있는데 하마비 앞면에 ‘하마비(下馬碑)’라고 쓰여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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