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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420
한자 古代
영어음역 Godae
영어의미역 Ancient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고대/고대
집필자 주명준

[정의]

초기 국가 시대부터 남북국 시대까지의 전라북도 고창 지역의 역사.

[개설]

고대라는 개념은 서양의 고대·중세·근대의 세 시기로 나눈 시대 구분을 원용한 것이다. 서양사에서 고대 사회의 특징은 주로 생산 관계를 중심으로 한 경제적 관점에서 보는 노예주와 노예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사에서 서양사의 경우와 같은 노예 경제 체제를 인정할 수 없다는 점은 한국사에서 고대 설정을 어렵게 하는 가장 큰 요소이다. 이런 문제의 해결을 위해 통일 신라 이전 노동력 중심의 수취 체제를 한국적 고대의 특징으로 보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적 고대의 특징은 통일 신라까지 지속되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통용된다. 여기에서는 고조선·부여·옥저·동예·삼한 등이 있던 초기국가시대, 가야·고구려·백제·신라 등이 있던 삼국시대, 통일신라·발해·태봉·후백제 등이 있던 남북국 시대 등으로 구분하여 살펴보도록 한다.

[초기 국가 시대]

고창 지역에서 말하는 초기 국가 시대는 마한 시대를 일컫는다. 철기 시대 한반도 중 남부에는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이 성립되었으며, 고창은 마한의 영토로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에 속했다. 마한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유물과 인접 사료들을 종합해서 이 시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54개의 나라들이 지금의 어느 곳인가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대체로 고창 지역은 모노비리국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백제 시대에 ‘모량부리(毛良夫里)’가 여기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의 생활은 중국 사서인 『위지(魏志)』한전(韓傳) 마한조에 보이고 있다. 이에 따르면 마한의 주민은 농경·잠업·직조 등을 알고 있었고, 각 소국마다 신지(臣智)·읍차(邑借) 등의 수장이 있어 다스렸고, 그 규모는 큰 나라는 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호에 이른다고 되어 있다. 여하튼 마한 시대의 고창은 초기 농경 소국사회에서 전라북도 어느 지역보다도 활발하게 성장했던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삼국 시대]

삼국 시대에 고창은 백제의 모량부리현(牟良夫里縣)·송미지현(松彌知縣)·상로현(上老縣)·상칠현(上漆縣)에 속하였다. 고창 지역은 백제 시대에도 상당한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1983년 운곡리 고인돌을 발굴할 때 우연히 도질 토기 도요지가 나타났는데 이는 한반도 최초의 백제계 도요지였다. 이처럼 백제 시대에 비교적 우수한 문화를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지역보다 농업 생산력이 향상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고창의 명칭이 모량부리였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는 ‘부리’라는 말이 붙은 명칭이 많이 보이는데, ‘부리’라는 명칭을 사용한 고을은 거의 중요한 곳이었다. 그리고 부리는 ‘벌’을 지칭하는데, 즉 평야, 평지로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을 뜻하는 것이었다.

고창의 인구가 다른 지역보다 많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고창군 관내에 백제 시대의 성들이 다른 지역보다 많다는 데서도 찾아 볼 수 있다. 1942년에 간행된 『조선고적조사자료(朝鮮古蹟調査資料)』에 의하면 흥덕면 흥덕리, 아산면 상갑리, 오산면 예지리, 성송면 상금리, 대산면 성남리, 무장면 화산리, 상하면 하장리, 해리면 왕촌리 등에 백제의 성곽 유적이 있다. 특히 1990년에 서산산성의 실측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여기에서 백제 시대 기와, 토기 파편이 출토되었고,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상단의 건물 터는 길이 120m, 최대폭 12m, 하단의 건물 터는 길이 75m, 최대폭 12m에 이르렀다. 이러한 규모는 지금 보더라도 대단한 규모이고, 당시로 보아서는 매우 큰 성이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남북국 시대]

통일 신라 때인 757년(경덕왕 16) 모량부리현은 고창현으로, 송미지현은 무송현(茂松縣)으로, 상로현은 장사현(長沙縣)으로, 상칠현은 상질현(尙質縣)으로 개칭되었으며, 보리고을을 상징하는 모량부리의 속명인 모양(牟陽)이 이곳의 지명으로 함께 사용되어 왔다. 뒤에 고창현·무송현·장사현 3현은 무령군(武靈郡)[영광]의 영현(領縣)이 되었고, 상질현은 고부군의 속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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