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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191
한자 龍基里
영어음역 Yonggi-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심원면 용기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상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법정리
면적 4.35㎢
총인구(남, 여) 164명[남 81명, 여 83명][2014년 12월 31일 기준]
가구수 82세대[2014년 12월 31일 기준]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심원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유래]

용기리는 풍수지리상 마을 앞산의 생김이 용의 형국이어서 용기(龍基)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기 무장군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수다동(水多洞)[일명 수대동]을 병합하여 용기리라 하고 심원면에 편입하였다.

[자연환경]

웃뜸 남쪽에 삼망산(三望山)[일명 삼보래기]이 솟아 있어 산 정상에 오르면 정읍군의 영주산(瀛州山), 부안군의 봉래산(蓬來山), 고창군의 방장산(防丈山)을 바라볼 수 있다. 수다동 동쪽에는 산세가 종달새 형국인 종조리봉[일명 종조리산]이 있고, 용기 서쪽에 예전 막을 치고 살던 마을이 있었던 고막(古幕)[일명 고막이], 고막 뒤쪽에 상고막이, 고막 아래쪽에 하고막이 등의 들이 펼쳐져 있다.

멍에바우 위에 소뿔처럼 뾰족한 쇠뿐바우, 종조리봉 동쪽 줄기에 멍에 모양의 멍에바우, 종조리봉 위에 상여 모양의 생여바우가 있고, 멍에바우 밑에 소구유 모양의 웅덩이인 구시둠벙이 있다. 용기에서 수다동으로 넘어가는 용기재[일명 수다동재], 수다동 뒤에서 아산면 삼인리로 넘어가는 작은재, 수다동 뒤에서 작은재를 넘어 아산면 삼인리로 넘어가는 큰재 등의 고개가 있다.

용기 남쪽에 용기저수지(龍基貯水池)[일명 용기제]가 있고, 군산리 다섯 골짜기 물이 북쪽으로 흘러내려 사철 마르지 않고 서해로 흘러드는 장수강(長水江)이 있다. 수다동 정 참판 묘 아래에는 식수용 우물인 검검시암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소금을 만들었다는 검단선사가 손을 씻어서 물빛이 흐리고 짠맛이 난다고 한다. 용기 동쪽 갯가에는 용기와 부안면 선운리를 이어주는 좌치나루터[일명 좌치진(坐雉津)]가 있다. 나루터 모양이 꿩이 앉은 형국이어서 붙인 이름이다.

[현황]

용기리심원면의 북동부에 있다. 2010년 3월 기준 면적은 4.35㎢로 밭 0.19㎢, 논 0.47㎢이며, 2014년 12월 31일 기준 인구는 총 82세대에 164명[남 81명, 여 83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용기리·수다리 2개의 행정리와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다. 아랫뜸·웃뜸·안골 등의 마을도 있다. 수다동은 용기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에 임내[일명 인천]가 흐른다. 아랫뜸은 용기 아래쪽에, 웃뜸은 용기 위쪽에, 안골은 웃뜸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문화 유적으로 영조 때 효자 오득인과 아들 오성손을 모신 백천재(栢泉齋)와 두 사람에게 내린 오효자 정문(吳孝子旌門) 등이 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오득인이 시묘를 살면서 동네의 우물이 흐리므로 날마다 큰 재까지 가서 샘물을 길어 왔는데 그 뒤부터는 동네 우물이 다시 맑아졌다. 또 묘 둘레에는 동백나무를 꺾어 심어 놓았는데 모두 뿌리를 내리고 살았으므로 고종 때 나라에서 정문을 내렸다고 한다.

그 밖에 웃뜸 동쪽 들에 서당인 양사재(養士齋) 터, 종조리봉 아래에 작은 절터, 좌치나루터 뒷산에 선비 유영작(柳永綽)이 세운 독수정(獨秀亭) 터가 있다. 용기 서쪽 길가에는 김녕김씨가 벼슬을 한 기념으로 솟대를 세웠던 소죽 터가 있고, 웃뜸 뒤에는 당산제를 지냈던 크고 오래된 당산나무가 있다. 용기리 오른쪽으로 국도 22호선이 지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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