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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003
한자 彌勒出現-兜率蓭磨崖佛-兜率天內院宮-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선운사지도보기
집필자 송화섭

[개설]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농민 봉기가 발발한다. 1890년대 호남 지방에서 사회 혼란을 틈타 미륵 신앙이 성행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고창 선운사 도솔암의 마애불의 배꼽에 장식되어 있고, 그 ‘배꼽’과 ‘미륵비결’ 설화가 관련되어 있다. 선운사 「석불비결 설화」의 주체는 무장에 도소를 둔 동학 접주 손화중(孫化中)이 주체이지만, 동학도라기보다는 손화중이 이끄는 농민군이었다.

봉건 왕조의 위기는 미래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사회 전반에 미륵불 출현을 신봉하는 풍조가 생겨나던 시기였다. 조선 후기 민중 의식의 성장은 농민들이 주체적으로 나서서 낡은 봉건 왕조를 해체하고 새로운 미륵 세상의 도래를 갈망하는 꿈을 꾸고 있었던 시기였다. 마침내 1894년[갑오]에 고창군 농민들은 동학 접주 손화중을 따라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의 배꼽 속에 든 비결을 꺼내고 미완의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새 세상이 열릴 미륵의 땅, 전라도]

미륵 신앙은 이상적인 복지 사회를 제시하는 미래불로서의 미륵을 믿는 신앙이다. 따라서 미륵 신앙은 사회 모순을 해결해 주는 구세주로서의 미륵을 갈구하는 사회개혁 이념으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전라 우도의 땅에는 유난히 미륵불이 많다. 우도는 평야 지대를 말한다. 익산, 김제, 정읍, 고창, 부안 등이 평야 지대에 위치한다. 백제 시대 전라 우도의 중심에 고부가 있었다. 최근 정읍 고부읍성의 발굴로 백제 오방성 가운데 중방성의 위치가 확인되었다. 중방성의 전통은 백제 시대부터 조선 시대 고부군까지 이어졌다. 고부군은 정읍, 흥덕, 고창, 무장을 아우르는 큰 행정 단위였다. 고부의 고사부리성이 백제의 중방성이었다는 사실은 백제 시대부터 고부가 정치적으로 중심적 기능을 하였다는 뜻이다. 고부읍성이 백제의 오방성 가운데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다. 백제의 지리적 여건을 살펴보면, 고부는 전라 우도 지역의 중심에 있다.

1. 미륵사의 창건

백제 무왕대에 익산에 동양 최대 규모의 미륵사(彌勒寺)가 창건된다. 익산 출신 무왕이 왕으로 재위하면서 용화산 아래에 미륵사를 창건하여 살기 좋은 땅, 풍요로운 땅 전라도의 징표로 미륵 신앙을 심는다. 백제의 수도인 부여가 아닌 익산에 미륵사 창건이라는 대규모의 토목 공사를 실시한 것은 왕실 내부의 불만과 정치적 갈등 관계도 있었지만, 무왕은 드넓은 평야 지대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미륵 신앙을 유포시키고 새로운 이상 국가의 희망프로젝트로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하는데 적극적인 후원자가 지명법사였다. 미륵사 창건 이전에 지명법사가 주석하고 있는 사자사(師子寺)가 용화산에 있었다. 지명법사가 있는 용화산 사자사는 미륵보살이 정좌하고 계시는 도솔천 내원궁과 같은 곳이다. 『미륵상생경』에는 미륵보살이 “도솔천 내원궁 칠보대 안 마니전 위의 사자상좌에 홀연 화생하여 연꽃위에 가부좌하고 앉아 있다”고 되어 있다. 이 내용을 빌어 지명법사는 도솔천 내원궁의 사좌상좌에 계시는 미륵보살 같은 존재이며, 그곳은 미륵 상생 도량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도솔천 내원궁에 계시는 미륵이 하생하여 삼회 설법장으로 조성된 곳이 미륵사지이다. 따라서 사자사가 미륵 상생 도량이라면, 미륵사는 미륵 하생 도량이었다. 미륵 하생 신앙은 미륵 출현을 의미한다. 백제 시대부터 전라도의 땅 백성들은 미륵 하생을 강렬하게 염원하였음이 익산 미륵사 창건으로 입증된 것이다.

2. 금산사의 창건

익산 미륵사 창건의 전통은 모악산 금산사 창건으로 이어졌다. 766년(신라 혜공왕 2)에 진표율사가 금산사를 창건한다. 익산 미륵사가 용의 처소인 연못을 메워 미륵사를 창건하였듯이, 금산사도 연못을 숯으로 메워 미륵전을 창건하였다. 미륵전은 3층 목조 건물로 지어졌는데, 각 층의 편액 가운데 2층에 용화지회(龍華之會)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고, 1층에는 자씨보전(慈氏寶殿)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 미륵전은 미륵보살이 하생할 용화삼회의 설법장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금산사 미륵전이 미륵 하생 도량이라면, 미륵보살이 좌정하고 계시는 미륵 상생 도량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미륵전 바로 옆에 방등 계단이 있다. 이 방등 계단이 미륵 상생 도량인 것이다. 방등 계단 중심에 위치한 사자좌에는 석종형 부도가 위치하고 있다. 금산사에도 미륵 상생처와 미륵 하생처가 조성된 백제 미륵신앙의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 온 것이다. 연못을 메운 공간이 좁아서 용화삼회 설법장을 입체적인 3층 건물로 지은 것이다.

3. 미륵보살의 조성

전라 우도에서 미륵 신앙은 물 흐르듯이 흘러 고려 시대에 고창 선운산 도솔암의 깎아지른 절벽 암면에 도솔천 내원궁 사자좌에 계시는 미륵보살을 조각해 놓았다. 백제 미륵 신앙의 기운이 통일신라 시기 김제를 거쳐 고려 시대 고창까지 이어진 것이다. 도솔암 마애불은 백제 시대 미륵 신앙인 미륵 상생과 미륵 하생의 구도를 구현해 놓은 미륵 상생처이다. 말하자면 선운산은 익산 용화산이나 마찬가지이다. 고려 시대 고부군 무장현 사람들이 가진 미륵 하생 신앙은 조선시대 동학농민혁명을 꽃피우는데 원동력이 되었다. 민중 중심적 사고로 미륵 출현을 갈망하였던 전라도 사람들은 갑오년에 농민 봉기를 실현하여 미륵 세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1890년대 미륵 신앙과 동학사상의 교섭]

1860년대는 전국의 군현 단위에서 산발적으로 민란이 일어나는 시기였으며, 1890년도부터는 경향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분출하여 농민 항쟁이 본격화되는 시점이었다. 1892년에 고부군 무장현에서 농민 봉기의 신호탄이 쏘아 올려졌다. 마침내 선운산 도솔암의 마애석불의 배꼽에서 비결이 공개된 것이다. 도솔암의 마애불은 고려 중엽 이후에 제작된 대형의 마애불이지만, 조선 후기에 미륵 신앙이 성행하면서 미륵불로 숭배되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 미륵신앙이 농민 계층으로 확산되면서 미륵 출현의 꿈은 현실로 다가왔다. 미륵이 출현하는 날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무장현손화중은 고부 농민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구현해 줄 메시아 같은 존재로 인식되어 있었다. 손화중은 미륵은 아니지만 지역 주민들에게 새로운 대동사상과 후천 개벽사상에 대하여 설파하는 위대한 동학 접주였다. 손화중이 마애불의 배꼽 속에 든 비결을 꺼내들고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하였다. 석불 비결을 꺼낸 뒤 2년 만에 고부 농민 봉기가 발발한다. 농민 봉기는 고창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었다. 19세기 말은 전국적인 현상이었으며, 조선 후기 미륵신앙의 성행이 동학 농민군들을 도솔암 마애불로 이끈 것이다.

도솔암의 마애불은 조선 후기 무장현에서 미륵 신앙과 동학사상이 어떻게 교섭되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도솔암 마애불이 미륵불이라는 사실은 마애불 뒤쪽에 위치한 도솔천 내원궁이 말해준다. 도솔천 내원궁은 미륵보살이 좌정하고 계시는 곳이다. 내원궁의 사자좌에 좌정하시어 천중들에게 설법하시고 계시는 모습이 도솔암 마애불로 표현된 듯하다. 도솔암의 아래에서 바라보면, 미륵보살의 입모양이 마치 그릇된 권세가들에게 호통을 치는 듯하고, 어찌 보면 도솔천에서 천중들에게 설법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세상이 혼탁하고 아비귀환의 시대에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질 때 즈음에 언제든지 출현을 하겠다는 포고를 하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도솔암의 마애불은 미륵보살이 세상에 출현하는 암중 출현형의 미륵불이라 할 수 있다. 백성들이 마애불의 가슴에 배꼽을 만들고 비결을 넣어둔 채 회칠하여 봉해 놓았으니 백성들이 미륵보살에게 문서를 맡겨 놓은 것이라 하겠다. 농민들이 언제라도 권세가들을 응징하겠다는 포고문을 미륵보살에게 맡겨 놓은 것이다.

[도솔암 「석불비결 설화」의 의미]

1. 「석불비결 설화」의 내용

1940년 오지영(吳知泳)이 집필한 『동학사(東學史)』에 도솔암의 마애불에 대한 「석불비결 설화」가 실려 있는데, 다음은 그 이야기의 일부이다.

“임진년(壬辰年) 팔월간(八月間)의 일이다. 전라도 무장현 선운사 도솔암 남편에 층암절벽이 있고 전면에 큰 불상이 새겨져 있다. 전설에 의하며 그 석불은 삼천년 전 검단선사의 진상이라고 하며, 그 석불의 배꼽 속에 신기한 비결이 들어 있다고 한다. 그 비결이 나오는 날은 한양이 다된다는 말이 적적하다. 그 증거로 103년 전 전라감사로 살러온 이서구(李書九)라는 이가 도임한 후 며칠 만에 망기(望氣)를 하고 남으로 내려가 무장 선운사에 이르러 도솔암에 있는 석불의 배꼽을 떼고 그 비결을 내어 보다가, 그때 마침 뇌성벽력이 일어나므로 그 비결책을 못다 보고 도로 봉해 두었다 한다. 그 비결의 첫머리에 쓰여 있으되 “전라감사 이서구 개탁(開坼)”이라고 한 글자만 보았다. 그 후에도 어느 사람이 열어보고자 하였으나 벽력이 무서워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손화중(孫和中) 접중(接中)에서는 선운사 석불 비결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 비결을 내어 보았으면 좋기는 하겠으나 벽력이 일어나면 걱정이라 하였다. 그 좌중에 오하영이 도인이 말하되 그 비결을 보아야 할 것 같으며 벽력(霹靂)이라고 하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다. 나는 들으니 그러한 중대한 것을 봉진할 때에는 벽력살(霹靂殺)이라는 것을 넣어 봉하면 후인이 함부로 열어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 들었다. 내 생각에는 지금 열어보아도 아무 일이 없으리라고 본다. 때가 되면 열어 보게 되나니, 여러분은 그것을 염려말고 다만 열어볼 준비만을 하는 것이 좋다. 좌중에는 그 말이 가장 유리하다 하여 청죽 수천 개와 고색 수천 파를 구하여 부계를 만들어 석불의 전면에 안진하고 석불의 배꼽을 도끼로 부수고 그 속에 있는 것을 꺼내었다. 그것을 꺼내기 전에 그 사찰 중들의 방해를 막기 위해 미리 수십 명의 중을 결박해 두었는데, 그 일이 다 끝나자 중들은 뛰어나가 무장 관청에 고발하였다. 어젯밤에 동학군들이 중들을 결박 짓고 석불을 깨뜨리어 그 속에 있는 것을 도적질하여 갔다고 하였다.”

2. 「석불 비결 설화」의 의미

이 이야기는 1892년 8월을 시대적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서구가 마애불의 배꼽을 열고 비결을 꺼내려 하자 뇌성벽력이 일어났다는 것은 비결이 권세가들의 몫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마애불 가슴의 배꼽 표시는 조선 후기에 농민군들이 조각해 놓은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비결을 꺼낼 때에 벽력살과 함께 넣어두면 괜찮다는 이야기로 알 수 있다. 배꼽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탯줄을 끊어야 비로소 새 생명으로 탄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배꼽이다. 그런 의미에서 배꼽은 새로운 세상을 여는 창구이기도 하고, 새로운 세상을 창생하는 의미를 갖는다. 미륵 출현을 간절하게 소망하는 민중들이 마애불 가슴에 배꼽을 조각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배경은 백제 시대부터 내려온 뿌리 깊은 미륵 하생 신앙의 현재적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이 고창 일대에는 지중 출현형의 미륵 신앙이 뿌리 깊게 신봉되고 있다. 도솔암 마애불에 줄을 타고 올라가 배꼽을 조각한 것은 미륵 출현을 간절하게 소망하던 용화향도(龍華香徒)의 소행이 아닐까. 용화향도들은 조선 초기에 매향과 불사를 주도하면서 미륵 하생을 간절하게 소망하던 결사체들이었다. 용화향도들은 성리학 지배 집단의 억불정책으로 숨을 죽인 채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두레 활동을 주도적으로 하는 향도(鄕徒)로 변모하였다.

두레꾼에게 마침내 기회가 왔다. 무장현 동학접주 손화중 접중에서 소속 두레꾼은 도솔암 마애불에 배꼽을 조각해 놓고 비결이 있으며, 이 비결이 출현하는 날 조선은 망한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그리고 그 비결을 손화중포에서 꺼냈다는 소문은 전국적으로 급하게 타전되었다. 온갖 참언이 유포되던 시기에 도솔암의 석불 비결 이야기는 농민을 들뜨게 만들었다. 농민은 곳곳에서 후천 개벽의 도래를 희망하는 찬가를 부르며 대동단결의 의지를 굳혀 갔다. 마침내 2년 뒤 농민 봉기의 결정판인 동학농민혁명의 기치가 고창 무장에서 포고문을 선포하고 조직적으로 봉기에 나선 것이다. 그 두레꾼들을 이끌고 앞장선 사람이 손화중이다.

전봉준손화중이 손을 잡고 백산 봉기 이후 황토현 전투에서 승전을 하고 전라감영을 접수하여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미륵 세상의 실현을 목전에 두었다. 그러나 맨손으로 나선 농민들의 꿈은 끝내 좌절되고 미완의 동학농민혁명은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도솔암 마애불과 검단선사]

1. 미륵불에서 검단선사 상으로

갑오년이 지난 뒤에 무장 지역 사람들은 마애불의 주인을 미륵불에서 검단선사(黔丹禪師)로 바꿔 숭배하기 시작하였다. 미륵 신앙은 현세 이익적인 성향이 강하여 언제든지 민간 신앙과 결합한다. 1800년대 무장현 사람들이 미륵 출현을 간절하게 염원하여 마애불에 배꼽을 새겨 놓았지만 동학농민혁명은 큰 성과 없이 종결되었다. 그렇게 되자 도솔암 마애불검단선사의 영상(影像)으로 대치되었다. 검단선사선운사의 창건주로 알려졌다.

검단선사선운산에 몰려온 도적들을 참회시켜 심원면 해안의 사등마을에 터를 잡고 자염을 생산하는 생업을 만들어준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사등마을을 검단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검당마을과 염정」이라는 설화가 이를 증명해 준다. 검단선사가 어느 시대에 살았던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검단리 사람들은 검단선사선운산으로 돌아가 도솔암의 마애불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마치 사실처럼 이야기 한다.

2. 산신각에 봉안된 검단선사

검단선사의운화상과 함께 도솔암선운사의 산신각에 봉안되어 있다. 다른 사찰의 산신각에는 산신도가 정면에 봉안되어 있는데, 선운사의 산신각에는 검단선사가 산신도 자리에 봉안되어 있다. 검단선사선운산의 산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무장 지역 사람들에게 검단선사선운사 산신으로 설정하면서도 마애불을 검단선사의 영상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을 구제해 줄 미륵 출현의 꿈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백성들의 삶이 급박해질 때에 도솔암 마애불은 또다시 미륵보살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날이 언제 올지 모르지만 백제 시대 이후 농토에 깃든 미륵 신앙의 기운은 살아 있다. 그 기운이 지하에 흐르고 있어 지표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을 뿐이다. 미륵은 시도 때도 없이 출현하는 게 아니다. 말법시대가 도래하는 날에는 다시 중생 구제를 위하여 하생할 것이다.

[또다시 미륵 출현을 꿈꾸는 사람들]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고 평온을 되찾았다. 도솔암 마애불의 배꼽은 그대로 있다. 언제 누가 다시 그 배꼽을 열고 비결을 꺼낼지는 아무도 모른다. 배꼽의 문은 회칠하여 견고하게 닫혀 있다. 또 다시 오탁악세의 말법시대가 도래한다면 농민들은 다시 도솔암 마애불에 찾아와 도끼로 배꼽의 문을 부수고 비결을 꺼내려 할 것이다. 미륵불은 현세불이 아니라 미래불이다. 평정심을 찾아 농사짓고 있는 농민들이 현세불을 믿지 못하게 될 때에 새로운 미륵 세상의 실현을 꿈꾸며 마애불을 찾게 될 것이다. 지금 백성들의 생활은 평온하다. 도솔암 마애불을 찾는 사람들은 마애불 뒤쪽으로 108계단을 올라 도솔천 내원궁에 오르고 또 오른다.

도솔천 내원궁에는 미륵보살이 좌정해야 하는데, 도솔암도솔천 내원궁에는 금동지장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곳에 계셔야 할 미륵보살이 중생 구제를 위하여 하생하였으니 빈 집을 지장보살이 지키고 있는 것이다. 도솔암 마애불은 미륵보살이 도솔천 내원궁에 좌정하고 있는 모습이어서 그곳이 곧 내원궁이라 할 수 있는데, 후대에 그 뒤쪽에 도솔천 내원궁을 짓고 금동지장보살을 모신 것이다. 1894년 이후 농민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 그곳에 내원궁을 짓고 금동보살을 봉안한 것으로 보인다.

지장보살은 극락왕생을 서원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간절하게 소망을 비는 곳이다. 사후에 도솔천 내원궁에 계시는 미륵보살을 친견하여 설법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지장보살은 극락왕생을 서원하는 사람들을 도솔천 내원궁까지 인도하는 보살이다. 그들은 미륵 하생을 꿈꾸는 자들이다. 56억 7천만 년 뒤에나 올 미륵 하생을 기다리며, 미륵 상생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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