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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마을을 찾아가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C020401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마래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명철

고창터미널에서 26㎞ 가량 떨어져 있는 공음면 구암리는 전라남도 영광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특히 큰샘이 있어 ‘샘거리’라고 불리는 구암리 마래마을 마래주유소 주변은 도의 경계가 모호할 정도로 뒤섞여 있다. 길 하나, 도랑 하나, 담장 하나, 밭두둑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나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1:50,000 지형도」에서도 그 경계가 끊겨진 채로 표기되어 있다.

[샘거리에서 두암저수지까지]

샘거리는 국도 22호선국도 77호선이 나눠지는 곳으로 삼거리를 이루고 있다. 샘거리에서 동쪽으로는 곧바로 마래마을이 이어지고, 남동쪽으로 국도 22호선을 따라 500m쯤 더 가면 구수마을이 나온다. 남서쪽 방향으로 난 국도 77호선은 전라남도 영광군 홍농읍 단덕리와 경계를 이루면서 홍농을 거쳐 가마미해수욕장으로 이어진다. 따지고 보면 예나 지금이나 마래마을 앞 샘거리는 경계이면서 만남의 공간이다.

샘거리에는 경주최씨 삼효각, 고인돌, 말바위, 입석[줄당산], 큰샘, 효자농은최공기행비 등의 문화유적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마래주유소를 바라보고 왼쪽 도로변에 서 있는 경주최씨 삼효각경주최씨 집안의 것인데, 이 집안은 대대로 효자를 배출한 이름난 가문이었다. 2007년 5월 9일에도 경주최씨인 구수마을의 최대기 씨가 대한노인회에서 주는 효자상을 받았다.

마래주유소 왼쪽으로 난 골목길로 접어들면 거대한 고인돌이 눈에 들어온다. 이 고인돌의 덮개돌에는 곡물을 측량하는 도구인 도량형이 파져 있다. 25㎝ 내외의 사각형 홈인데, 우리가 요즘 사용하는 한 말[斗] 단위는 아닌 듯하다. 또한 말바위에 새겨진 도량형의 네 귀가 정확한 동서남북을 가리키기 때문에 지관들이 나침반에 고장이 나면 이 말바위에서 남북의 방향을 맞추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영광 땅 덕림마을 앞에 있는 되바위에도 사각형의 홈이 파여 있다. 전설에 의하면 중국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축성할 때 한 장수가 영광군 흥농읍에 있는 덕림산에서 바위를 수집하여 가던 중 축성 작업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버려 두고 간 바위라고 한다.

마래마을 뒤쪽에 있는 두암저수지로 발길을 옮겨 보자. 낚시꾼들 사이에서는 꽤나 알려져 있으며, 붕어가 많이 잡힌다. ‘대정제’라고도 불리는 이 저수지는 1927년 일본인 대지주가 축조한 것으로, 영광 법성포에서 구암리 마래마을에 이르는 광활한 간척지를 개발하고 거기에 필요한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당시 인근 지역의 주민들이 공사에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저수지 둑에 올라서면 당시에 동원된 백성들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물속에 수장되어 있는 듯해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저수지가 축조되면서 두암마을 앞 약 0.45㎢의 농경지가 수몰되어, 농경지를 잃은 주민들은 영광군 법성면 새목이란 지역[두암에서 서쪽으로 5㎞에 위치]에 이주하여 ‘신두암’이라는 마을을 형성했다고 한다. 현재 두암저수지는 한국농어촌공사 영광지사에서 관리를 맡고 있다. 수혜를 입는 지역이 전라북도가 아니라 전라남도 영광군 지역이기 때문이다.

[구암천의 추억과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지]

저수지를 내려와 구암리 구수마을로 가는 길은 구암천을 옆에 낀 농로길이다. 갈대가 지나는 길손에게 연신 고개를 수그리며 인사를 건넨다. 서쪽 하늘로 기우는 햇빛에 부서지는 늦가을 갈대의 잔털이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구암천은 이곳에서 시작하여 구수마을을 지나 영광군 법성면과 홍농읍의 경계를 따라 흘러 서해로 이어진다. 저수지를 막기 전에는 아홉 줄기의 물이 흘러내렸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직선으로 흐르는 하천과 바둑판처럼 반듯이 구획된 농경지가 펼쳐져 있을 뿐이다.

구수마을 전윤호[1938년생] 씨에 따르면, “저수지를 막기 전에는 송림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이 마을을 지나 법성포까지 이어졌는데, 자라와 장어와 붕어가 많이 올라와 농한기 때는 천렵을 하여 잔치를 벌일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옛날에는 그 하천을 따라 소나무, 왕버들, 느티나무로 구성된 ‘수구막이숲’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왕버들 두 그루만 남아 쓸쓸하게 마을을 지키고 서 있다.

마을 사람들은 “아주 큰 나무가 하천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어서 나무에 말도 매고 그늘에서 담배도 엮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게다[일본 사람들이 신는 나막신]’ 만든다고 베어 가고 면장이 베어 가고, 남은 것은 새마을 운동하면서 다 베어 버렸다.”고 한다. 마을에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막아 주는 울타리였고 하천 제방을 튼튼하게 해 주어 홍수를 막아 주었을 수구막이숲, 그 아래서 새참을 먹고 천렵을 하던 추억들을 뒤로 하고 구수마을 동학 농민 운동 무장기포지로 발길을 옮긴다.

구수마을에 위치한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지에 들어서면 동학 농민군의 함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그곳에는 동학농민혁명기념탑이 서 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민권 운동으로 민족ㆍ민중 운동사의 큰 분수령을 이룬 1894년 3월 20일 동학농민혁명의 제1차 봉기지로서의 의미를 전해 주고 있다.

농민 운동의 강렬한 의지와 열정이 형상화된 횃불 모양의 동학농민혁명기념탑에는 제폭구민ㆍ보국안민의 대의를 위해 만방에 봉기할 것을 호소하는 역사적인 장면이 부조로 표현되어 있다. 동학농민혁명기념탑은 2002년 혁명의 참뜻을 기리고 자손만대에 그 교훈을 널리 기리기 위해 동학 농민 운동 기포지 선양 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되었다. 해마다 4월 말에 열리는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기념제에서는 동학 농민 운동 무장기포지인 공음면 구수마을에서 최초로 관아를 점령한 무장읍성까지 8㎞의 진격로를 걸으면서 당시 동학 농민군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 고창나들목 → 지방도 796호선 아산 방면으로 우회전 → 아산면 소재지를 지나 8.3㎞ 직진 → 무장면 소재지나 군도 10호선 6.3㎞ 직진 → 마래삼거리[마래마을] →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지[구수마을]

• 숙박 정보: 구암리 주변에는 숙박할 만한 곳이 없다. 승용차로 10분 거리인 대산면의 면소재지나 30분 거리인 고창읍으로 가는 것이 좋다. 마래마을 마래삼거리에 ‘거시기가든’과 ‘마래편의점’이 있다.

[정보제공]

  • •  전윤오(남, 1938년생,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노인회장)
  • •  최대기(남, 1938년생,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이장)
  • •  최진성(남, 1939년생, 공음면 구암리 마래마을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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