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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내 농민군 고창주와 최경칠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C020102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임선화

지금까지 우리는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었던 사람들만을 기억해왔다. 하지만 이들 세 명에 의해 주도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이들과 함께 했던 다수의 사람들이 있었기에 동학농민혁명은 가능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전봉준과 함께했던 이름 없는 농민군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대답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는 많지 않다”이다. 하지만 우리가 모를 뿐 아주 많은 사람이 농민군으로 참여하였다. 먼저 구수마을에서는 송총의 주인이었던 송문수와 더불어 농민군 고창주가 있었다.

고창주(高昶柱)[1858~1895. 3. 27]는 무장현 동음치면 당산리[현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출신으로 1894년 당시 열다섯 살이던 어린 아들 고광철(高光喆)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하였다. 그는 아들과 함께 황토현 전투, 장성 황룡촌 전투, 전주성 전투 등에 참전하였다. 또한 2차 농민 봉기에도 참여했다가 농민군 지도급 인물과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전봉준손화중최경선 등과 함께 몇 차례 심문을 받은 후 1895년 3월 3일 재판을 받았다. 이 재판에서 그는 무죄 선고를 받고 풀려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아들 고광철도 나이가 어려 무사히 풀려 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창주는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정읍에서 다시 체포되었다. 지방의 유림들과 유지들의 압력으로 다시 체포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1895년 3월 27일 지방 관원에 의해 처형되었고,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수습되어 안장되었다. 이후 1994년 5월, 그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을 동학 농민혁명 무장기포지에 있는 모정 옆에 세워졌다.

더불어 구수마을에는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했던 인물이 한 사람 더 있다. 그가 바로 최경칠이다. 최경칠은 동학 농민 운동에 참가했다가 창에 찔려 부상을 입고 구수마을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는 결혼한 누나의 집 광에 굴을 파고 숨어 지냈다가, 부상이 낫고 세월이 지나자 구수마을에 정착하였다. 최경칠이 동학농민혁명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동학 교단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다만 그의 손자 최진옥과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최경칠의 존재는 전해질 뿐이다.

[정보제공]

  • •  전윤오(남, 1938년생,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노인회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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