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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전설이 돼 버린 기맹기패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C010106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마래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경숙

공음면 구암리 마래마을에서는 농악패를 ‘기맹기패’라고 한다. 그리고 “농악을 친다”라거나 “풍물을 친다”고 하지 않고 “기맹기 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뜻이 무엇인지,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든 살이 넘은 최대근[1927년생] 씨에게 물었더니, “나도 뭔 말인지는 모르겄어. 어른들이 그렇게 불렀어. 언제부터 생겼는지도 모르제. 나 태어나기 전에도 있었고 증조할아버지 때도 있었제.”라고 대답한다. 마래마을 이장인 최인동[1952년생] 씨의 대답도 마찬가지였다. 이렇듯 그 뜻이 뭔지는 모르지만, 기맹기패는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진 마래마을 농악패라는 것과 마래마을의 자랑거리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마래마을의 자랑이었던 기맹기패]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는 기맹기패 상쇠의 계보는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박기봉 씨로부터 비롯된다. 그 다음 최장업-김창섭-김창진-최소진으로 이어졌다가 2000년경 마래마을 마지막 상쇠였던 최소진 씨가 작고하면서 그 맥이 끊겼다고 한다. 최대근 씨는 기맹기패의 영화롭던 시절을 더듬더듬 끄집어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장구를 어깨에 메면 흥이 나서 날라 다녔어. 여 근방에서는 기맹기패를 따라올 농악패가 없었제. 아주 셌지. 내가 소고를 했는디, 버꾸놀이[소고놀이]할 때는 스트레스가 쫙 풀려 버렸어. 지금도 꽹맹이[쇠] 칠 사람만 있으면 날라 다닐 것인디……. 우리 동네 소고꾼들은 다른 곳까지 팔려 다닌 양반들이여. 유명했제. 저기 창고[마을회관 창고]에 꽹맹이, 장구, 방구[북], 소고, 모자 다 있어.”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1950년대 말에 마래마을에서 풍물대회가 열렸다고 한다. 우승 상품으로 송아지를 걸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무척 컸던 모양이다. 그 대회에서 마래마을 기맹기패는 2등을 했다. “재주로는 1등을 했는디 이 마을이 1등하면 쓰겄냐는 말이 있어 상하면 장호리 굿패가 1등을 가져갔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기량이 뛰어났던 기맹기패는 지금 ‘전설 따라 삼천리’가 되어 버렸다. 그들이 썼던 쇠, 징, 장고, 북, 소고는 마을회관 구석진 창고에 처박혀 먼지만 쌓여 가고 있다.

[전국에 이름 날린 ‘만식이 성근이패’]

기맹기패 말고도 고창과 영광의 풍물패는 유명했다. 1945년 8ㆍ15해방이 되고 광화문 입성식을 할 때 굿을 친 ‘만식이 성근이패’도 이 지역 사람들이었다. 김만식고창군 상하면 자룡리 사람으로 장구잽이였고, 박성근은 영광군 홍농읍 월암리 사람으로 상쇠를 했다. 40대였던 그들이 활동했던 무렵이 이 지역 농악의 전성기였다. 대한민국 최고라고 불렸던 김만식의 장구 가락과 우도 농악의 최고 상쇠였던 박성근의 쇠가락은 해방을 전후로 하여 백성들의 울분을 달래 주었다. 구수마을 전윤오[1938년생] 씨가 희미한 기억을 되살려 냈다.

“내가 여덟 살 적에 벽보에 까만 종이가 붙었었는데 ‘만식이패 광화문 들어갔다’라는 문구를 봤었지. 어쨌거나 ‘영무장’이라는 말 들어 봤잖아? 그만큼 이쪽의 풍물패가 유명했었어.”

마래마을에서는 줄을 메고 농악을 치면서 마을을 한 바퀴 도는 오방돌기를 할 때 ‘만식이 성근이패’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최진성[1939년생] 씨도 기억을 더듬어 냈다.

“6ㆍ25 지나고 한 2년쯤 후였는데 만식이 성근이패를 돈 주고 불러 왔제. 그 전에 그 사람들이 이쪽에서 활동했을 때는 수시로 와서 쳤고. 그때는 제대로 구색을 갖춰 재밌게 놀아 볼라고 부른 것이제. 쇠꾼이 두세 명, 장구잽이가 두세 명 왔고 나머지 소고, 북, 장구는 우리 마을 사람이 했는디, 굉장했제. 그때는 굿을 쳤다 하면 날이 새도록 놀았어. 그 뒤로도 외지 패를 서너 차례 불렀는디, 법성포 당골들이 잘 쳤어.”

고창농악은 마을의 가장 큰 행사인 당산제를 중심으로 하여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의 안녕과 농사의 풍작을 기원하면서 농악을 쳤으며, 지친 삶을 위로하기 위해 놀이판을 벌였다. 마래마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기맹기패는 이농 현상으로 농촌 인구가 감소하면서 점차 약해졌으며, 지금은 전승이 단절되고 말았다. “꽹맹이 칠 사람만 있으면 지금도 날라 다닐 수 있다.”는 최대근 씨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정보제공]

  • •  최대근(남, 1927년생, 공음면 구암리 마래마을 주민)
  • •  최병호(남, 1927년생, 공음면 구암리 마래마을 주민)
  • •  이기화(남, 1935년생, 고창읍 교촌리 주민, 전 고창문화원장)
  • •  최명진(남, 1936년생, 공음면 구암리 마래마을 주민)
  • •  전윤오(남, 1938년생,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주민)
  • •  최진성(남, 1939년생, 공음면 구암리 마래마을 주민)
  • •  최인동(남, 1952년생, 공음면 구암리 마래마을 이장)
  • •  최재언(남, 1961년생, 고창읍 주민)
[참고문헌]
  • 『고창군지』(고창군지편찬위원회, 2009)
  • 고창농악(http://www.gochanggut.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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