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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치나루터와 질마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B010103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자현

옛날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에는 차가 들어오고 나갈 만한 큰길이 없었다. 간척이 되기 전, 진마마을은 바닷물이 넘실대는 해안 마을이었다. 마을로 들어오거나 마을을 나가기 위해서는 좌치나루터질마재 고갯길을 이용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좌치나루터주진천[또는 인천강ㆍ장수강]과 서해가 만나는 곳에 있었다. 좌치나루터에서 나룻배를 운영했던 뱃사공 2명이 마을에 있었다고 하여 수소문해 보았으나 모두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만 전해들을 수 있었다. 국도 22호선이 확장되고, 1995년에는 인근에 용선교가 건설되면서 나루터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지만, 좌치나루터는 한때 고창 서부 지역 사람들과 영광 법성포 사람들이 자주 왕래했던 교통의 요충지였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주막이 있었고 시인 묵객들이 자주 찾아왔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는 좌치나루터. 근래에 복원된 나룻배 한 척만 덩그러니 옛 풍경을 간직한 채 바람결에 출렁이고 있었다.

소요산 자락에 있는 질마재 역시 진마마을 사람들에게 중요한 교통로였다. 마을 사람들은 질마재를 넘어 부안면소재지를 거쳐 고창이나 정읍으로 나가곤 했다. 이 고갯길은 진마마을에서 부안면소재지까지 이어지는데, 어른 한 사람이 간신히 걸어 다닐 수 있는 삐뚤삐뚤하고 좁은 길이었다. 그래서 질마재 너머 부안면소재지에 있는 알뫼장터[난산장]나 소시장[우시장]으로 가기 위해 남자들은 지게를 짊어져야 했고, 부녀자들은 머리에 물건을 이고 이 고개를 넘나들었다.

질마재 고갯길에는 서낭당이 있었다고 한다. 서낭당 앞으로는 돌무덤이 쌓여 있었는데, 질마재를 넘어가는 길손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아무 사고 없이 무탈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하나씩 던져 놓은 돌멩이와 나뭇가지가 무덤처럼 커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서낭당이나 돌무덤에 대한 믿음 역시 오래 전에 사라져 버렸다. 고갯길을 넓힐 때 아무 생각 없이 서낭당과 돌무덤을 없애 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기억마저도 흐릿해졌다. 서낭당에는 작은 단지가 묻혀 있었다고 하는데,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질마재 고갯길은 ‘장터길’이라고도 불렸다. 진마마을 사람들이 장터에 해산물과 농산물을 내다팔기 위해 이 고갯길을 넘어 다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진마마을에서 부안면소재지까지는 15리쯤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갯벌에서 잡은 해산물과 논밭에서 키운 농산물을 지게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서 이 고갯길을 넘어 장을 오갔다. 길이 좁아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만 운반했다. 진마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것은 엄청난 고충이었다. 진마마을 사람 누구를 붙잡고 물어 봐도 대답은 한결 같다.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지라우. 겁나게 힘들었어라우.”

그러다 처음에는 우마차가 지나갈 수 있게 길을 넓혔다. 그 다음에는 경운기가 지나갈 수 있게 길을 넓히고, 그 다음에는 자동차가 넘어갈 수 있게 길을 넓혔다. 그렇게 몇 차례에 걸쳐 길을 넓히고 다듬어 지금의 길이 된 것이다.

[정보제공]

  • •  이만철(남, 1934년생,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 주민)
  • •  황점술(남, 1943년생,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 주민)
  • •  김수성(남, 1947년생,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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