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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포가 있던 그 시절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B010102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자현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 앞에는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다. 하지만 그곳은 원래부터 들판이 아니었다. 바다였던 곳을 간척하여 육지로 만들었다. 마을에는 포구도 있었다. 포구의 이름은 ‘선운포’였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가난해, 김성수 씨의 아버지인 동복영감의 전답을 소작하거나, 아니면 합자해 조그마한 배로 어업을 하거나, 밖에 사람들이 와 경영하는 소금막에서 노동을 하거나, 또 아니면 질마재를 넘어 다니며 어물 행상을 하였다.”

서정주 시인이 자서전에 남긴 마을 사람들 이야기의 한 대목이다. 소작농이거나 어부, 염부, 또는 행상을 하던 사람들의 서글픈 이야기다. 진마마을은 정말이지 ‘가난하고 서글픈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다.

[바다는 문전옥답이었다]

포구가 있을 때만 해도 진마마을에서는 10여 가구가 어선을 운영했다. 포구가 있을 때도 마을 사람들은 오로지 바다에만 의지하지는 않았다. 마을 주변의 땅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도 많았다. 선운포는 물이 깊었다. 먼 바다에서부터 돌풍이나 큰 파도가 밀려오기도 했으나 그로 인한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큰 파도는 대부분 미당 선생의 외가가 있던 방앗간 앞까지 들어오다가 빠지는 정도였다.

선운포가 있던 그 시절, 진마마을 사람들에게 바다는 삶의 터전이었다. 갈쿠리[갈퀴]를 들고 조개를 캐기도 했고, 쪽대를 이용해서 꽃게를 잡기도 했으며, 배를 타고 먼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기도 했다. 여느 어촌 마을과 다르지 않았다. 바다는 진마마을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문전옥답이었다.

선운포는 변산과 선운산 사이를 비집고 육지 속으로 파고 들어온 바다인 줄포만[곰소만]의 중요한 포구였다. 부안군과 고창군 사이에 있는 바다를 따라 들어가면 격포를 지나 줄포만으로 들어선다. 바닷물은 부안 쪽에서는 줄포를 지나 흥덕에서 끝나고, 고창 쪽에서는 동호를 지나 역시 흥덕에서 끝난다. 흥덕에는 선운포, 사진포, 상포, 후포 등 네 개의 포구와 죽도라는 섬이 있었다.

한때 선운포는 육지와 바다를 잇는 서해 선상 교통의 중요한 거점이 되기도 했다.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은 배들이 선운포로 들어오면 부녀자들이나 노역꾼들은 그 생선을 짊어지거나 머리에 이고 질마재를 넘어 부안면의 면소재지에 내다 팔았다.

어부들은 바다로 나가기 전에 반드시 고사를 지냈다. 배를 가진 사람들은 정성껏 장만한 제물과 술을 용왕께 올리고 풍어와 안전을 기원했다. 포구가 없어진 지금, 진마마을에서는 더 이상 뱃고사를 지내지 않는다.

당시에는 개막이도 많이 했다. 개막이를 하려면 먼저 갯벌에 고랑을 파고 그물을 그 속에 깐 다음 밑 부분이 뜨지 않게 고정시켰다. 밀물이 들어올 때를 기다렸다가 ‘똥막’이란 작은 배를 이용해 그물을 들어 올리면 생선이 가득했다. 이렇게 해서 갑오징어와 민어, 조기 등과 같은 어류를 잡았고, ‘붕초’라고 하는 해초도 건져 올렸다. 간혹 붕초에 갑오징어가 걸려서 잡히는 경우도 있었다.

꽃게는 포구 앞 갯벌에 널려 있었다. 쪽대를 밀어서 잡았는데, 얼마나 많은지 “둘이 가면 두 짐, 셋이 가면 세 짐”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많이 잡혔다. 이렇게 산물이 풍부하다 보니 진마마을에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하지만 바다가 육지로 바뀌고,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마을이 점차 작아져 오늘에 이르렀다.

더 이상 바닷물은 들어오지 않지만, 선운포가 있던 자리에는 작은 배 3척이 전시되어 있다. 바다로 나갈 수 없는 박제된 전시물이지만, 그 배는 마을 사람들에게 추억을 선사해 주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아 두고 있다.

[진마마을의 물때]

진마마을에서는 ‘물때’를 보고 배의 운행이나 고기잡이 등의 일을 결정하였다. 선운리 사람들의 물때는 ‘초야드레[8일]ㆍ스무사흘[23일] 조금’, ‘초하루[1일]ㆍ열엿새[16일] 일곱마’를 기준으로 배치돼 있다. 음력으로 물때를 계산하는데, 8일은 조금, 9일은 무시, 10일은 한무새[혹은 한마], 11일은 두마, 12일은 세마, 이후 네마, 다섯마, 여섯마 등으로 부르고, 23일은 다시 조금이 되고, 24일은 무시가 된다.

진마마을 사람들이 바다를 이용할 때는 물때에 대한 지식이 매우 중요했다. 생업과 관련된 가장 기본적인 정보가 모두 물때와 연관되었기 때문이다. 물때는 어민들의 생태적 시간이었다.

옛날 선운포에서는 사리 무렵에 다양한 어로 활동이 이루어졌다. 조수 간만의 차이를 이용한 어법이 발달한 것이다. 조금 기간에는 휴식을 취하면서 어구를 손질하고 출어 준비를 했다. 물이 살아나는 두마나 세마부터 고기잡이가 본격화되었으며, 사리 기간 내내 바쁘게 생활했다. 조개를 잡는 시기는 잔사리 기간이 적기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물때 계산법은 선운포 일대가 간척지로 변하면서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자리하게 되었다.

[정보제공]

  • •  서용석(남, 1939년생,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 주민)
  • •  김수성(남, 1947년생,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 주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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