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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종부로 살아온 세월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A030204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 가평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한미옥

[어렵고도 어렵던 종부 생활]

조순임 씨의 친정은 고창군 해리면 송산리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순임 씨를 ‘송산댁’이라고 부른다. 조순임 씨는 열여덟 살이었던 1940년에 이곳 신림면 가평리 가평마을에 사는 스무 살의 유내옥 씨와 혼인을 했다. 혼례를 올리고 난 뒤 1년을 친정에서 묵힌 뒤[예전에는 신랑ㆍ신부가 혼례를 올리고 난 뒤 바로 시댁으로 가지 않고 신부가 친정에서 몇 달 혹은 몇 년 간을 살다가 시댁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것을 ‘묵힌다’고 말한다] 열아홉 살에 이곳 가평리로 시집을 왔다. 열아홉 살에 가마 타고 들어온 시댁은 인동유씨 종가였고 그녀가 큰며느리였으니, 그녀는 인동유씨 집안의 종부로 시집을 온 것이다.

“내가 열여닯[열여덟]에 결혼해 가지고 열아홉에 [시집을] 왔어, 여그. 근게 1년 묵혔제. 봄에, 봄에 [혼례식을] 혀 갖고 인자, 저, 시안에[겨울에] 왔인게 가을에 시집 왔어. 봄에 하인들까지 다 거시기 해서 [혼수를] 다 보내고는. 거그는 이불 헌 놈, 뭣 헌 놈, 그냥, 보따리, 이러코 갖고 왔어. [시댁이] 식구가 원체 많어 근가[그런가] 무슨 살림들을 못 허등만. 안에서 살림을 그러코 못 허는가비여.”

시부모를 모시며 가문의 종부로 살아가는 세월은 참으로 힘이 들었다. 시댁은 집안 명성도 있고 먹고 살만한 땅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많은 집안 식구들 모두 일을 할 줄 몰랐다. 조순임 씨가 시집 왔을 때 모두 열두 식구가 살았는데, 시집 와서부터 집안 살림의 거의 전부를 며느리인 조순임 씨가 꾸려 갔다. 게다가 종손인 남편 밑으로 다섯 명의 시동생들과 작은 시어머니에게서 난 다섯 남매까지 모두 조순임 씨가 거둬 키우다시피 했으니, 그 고생이 말도 아니었다고 한다.

제사는 또 왜 그리 자주 돌아오는지, 큰 집안 살림에 아이들까지 돌보랴 허리 펼 날 없는 유씨 집안 종부 조순임 씨는 ‘옛날에는 맨~ 지새[제사]만 지내는가’ 싶었단다. 한 번은 제사 준비에 정신없이 바쁜 도중에, 소에게 소죽을 끓여 주고는 급한 마음에 뜨거운 떡시루를 들었다가 그만 자신의 다리에 엎어 버렸다고 한다. 그때 다리에 화상을 입어 지금도 불편한데, 당시에 둘째 시아주버니가 급하게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겨우 살았다고 한다.

“무슨 놈의 제사만 지낸게, 맨~ 제사만 지내제. 내가 술밥 찌다가. 술밥 찐거, 그때는 소도 키웠어. 저, 일꾼도 지르고. 근게, 저 챙겨서 줄 것을 헌다고 거시기 헌게. ……[중략]…… 내가 가서 소죽을 쪼께[조금] 거시기 헐라고, 그냥 가를 쳐들다가는. 아, 시루를, 시루를 띠다가 그때 2월이여. 그, 할매 이월 지사[제사] 때. 저, 술밥 허고 술 헐라고. 2월이여. 정신없이 거시기 허고는. [시루를] 띠어 놓고는, 내가 조용허게 헐라고 술밥을 거시기 해 놓고는. 소죽 퍼 줄라고 인자. 그러고 헌게. 아이, 그, 한 발로 딛기는 딛었는디 잘못 딛어졌든가비여. 근게, 2월인게 추운게 보신[버선] 신고. 저, 그때는 옷도 몸빼 뚜꺼운 놈 입고 보신 신고 헌게. 그런게 그 시루를 갖다 여그다 그냥 부서 버렸어. 아, 그런게, 아이고 그래도 우리 둘째 시아제 땜이 내가 살았어.”

[어린 나이에 남편 잃은 것보다 가문 대가 끊어질까 걱정했어]

이처럼 큰살림을 도맡아 힘들게 살았던 조순임 씨는 남편과도 오래 살지 못했다. 신랑이 일을 하느라 돌아다녔고, 흥덕중학교에서 공부도 했기 때문이다. 남편이 밖으로 돌아다닐 때인 1943년 시어머니가 아이를 낳다가 돌아가셨다. 시어머니의 상을 치른 후에 남편이 시어머니의 묘를 다녀오다가 철륭할아버지[가평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보름에 마을 가운데에 있는 당산할머니와 마을 뒤에 있는 철륭할아버지에게 제사를 지냄] 앞에서 잠시 쉬었다고 한다. 그길로 집에 돌아와서부터 한 달 동안 아프다가 죽고 말았는데, 사람들은 철륭할아버지한테 ‘지골을 맞았을 것’[철륭할아버지와 같이 신성한 곳에 상을 당한 부정한 몸이 앉았기 때문에 철륭할아버지가 화가 나서 병들어 죽게 했다는 의미]이라고 말했다. 그때 남편의 나이는 겨우 스물네 살이었다고 한다.

조순임 씨는 시집와서 시할아버지, 시할머니, 남편과 시아버지까지 모두 3년상을 치렀다. 하지만 그런 고생이야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었다. 종부로 시집와서 가문의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해 한 마음 고생에 비하면 말이다. 이런 저런 방법으로 아들 낳기를 소원했지만, 끝내 아들은 얻지 못한 채 남편도 일찍 저 세상으로 가 버렸으니, 자신의 대에서 자손이 끊길 위기에 처한 것이다.

“둘째 시아제 큰놈을 양자로 힜어. 근게 이 집 큰놈을 양자로 힜당게. 근게 큰놈은 저, 서울서 태어났드란게. 그 밑이 둘은 내가 거시기를 했는디. 다 내가 거시기 했는디, 큰놈만 서울서 태어났드란게. 그래서 나는 집 거시기, 그놈이 큰놈인게, 내가 그놈을. 거시기를 내가, 큰놈으로 세웠어.”

결국 둘째 시아주버니의 큰아들을 양자로 들여 가문의 대를 잇게 했는데, 현재 서울에서 살고 있기에 제사는 모두 서울에서 지내고 있다고 한다. 자신이 너무 늙어 힘든 탓에 혼자서 제사를 지낼 수 없기에 양자에게 물려 준 것이다. 현재 딸이 광주에 살면서 어머니를 모셔 가기를 원하지만, 조순임 씨는 가평마을에서 혼자 살고 있다. 비록 제사는 모두 물려주었지만, 가평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왔던 집을 지키기 위해 남아 있는 것이다.

[정보제공]

  • •  조순임(여, 1922년생, 신림면 가평리 가평마을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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