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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예맞이와 줄다리기 그리고 줄감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A010402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 가평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서해숙

[대풍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만드는 줄]

가평리 가평마을 사람들은 정월 초사흗날 새벽에 철륭제ㆍ당산제를 모신 뒤 정월 보름날 아침 마을 광장에 모여 줄다리기할 줄을 만들기 시작한다. 줄은 마을 입구에 있는 광장에서 만드는데, 그 해 상황에 따라서 바람이 심하게 불거나 눈이 많이 올 때면 당산할머니가 있는 당산거리에서 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주로 당산할머니 근처에서 줄을 만들었으나, 올해[2010년]는 마을 광장에서 줄을 만들었다.

우선 짚을 마련하는데, 예전에는 집집마다 있는 짚을 조금씩 걷으면 됐으나 지금은 가을걷이가 끝나면 모두 짚을 팔아 버리기 때문에, 이장이 미리 정한 마을 사람들의 짚을 돈을 주고 사 놓는다. 올해는 두 마지기[약 1322m²]의 짚을 10여만 원에 샀다.

줄은 7가닥을 하나로 하여 세 가닥을 만들기 때문에 모두 21가닥이고, 두 개의 줄이므로 총 42가닥의 줄을 만든다. 그러나 올해는 마을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줄의 규모가 줄었다. 그래서 5가닥을 세 가닥으로 해서 모두 15가닥이고 암줄과 수줄이므로 총 30가닥의 줄을 만들었다. 줄의 형상은 모두 같은데, 미리 암줄ㆍ수줄이라 정해 놓고서 암줄은 ‘할머니줄’, 수줄은 ‘할아버지줄’이라 부른다.

당산나무 앞 공터에서 할 때는 위쪽에 마련한 줄이 ‘할아버지’고, 아래쪽에 마련한 줄은 ‘할머니’라 부른다. 그러나 마을 광장에서 줄을 만들 때는 먼저 만든 줄이 할아버지고, 나중에 만든 줄이 할머니라 하여, 나란히 놓아둔다. 줄 머리는 둥그렇게 만들고, 사람들이 앉을 수 있도록 줄 위에 볏짚 한 단을 얹어서 새끼줄로 감아 놓으며, 그 위에 사람이 앉아서 잡을 수 있도록 줄을 연결해 놓는다.

이렇게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합심하여 줄을 만들어 놓으면, 풍물패가 앞장 서는 가운데 할아버지줄을 메고서 마을을 한 바퀴 돈다. 마을을 돌다가 논 가운데 위치한 철륭할아버지 앞에 다다르면 줄을 멘 사람들은 일부러 그곳까지 가서 인사를 드리고 당산할머니 쪽으로 향한다. 이렇게 줄을 메고서 마을을 도는 것을 마을 사람들은 ‘화재맥이’라고 한다. 곧 줄은 용을 상징하므로 물이 마르지 않고 모두 농사를 잘 지어 올 한 해에도 대풍하기를 기원하고, 마을의 화재를 막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다.

[풍년을 기원하며 벌이는 줄예맞이와 줄다리기, 줄감기]

이렇게 줄을 메고서 마을을 돈 뒤에 당산할머니 앞에 할아버지줄과 할머니줄을 놓아두고 ‘줄예맞이’를 한다. 할아버지줄과 할머니줄을 시집ㆍ장가 보내듯이 구식 결혼을 시키는데, 암줄과 수줄을 결합시키는 일련의 퍼포먼스가 거행된다. 먼저 줄 앞에 간단히 초례상을 차린다. 상에는 촛불을 켜 놓고 삼실과[대추, 사과, 곶감]와 포를 놓아둔다. 먼저 “신랑 일배!” 하면 마을 사람들이 할아버지줄을 들어서 세운다. 그러면 신부인 할머니줄이 이배를 올린다. 이어서 합주를 할아버지줄, 할머니줄 순서대로 마신다. 이는 실제 결혼하듯이 모든 형식을 갖추어서 한다.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줄 위에 실제 신랑ㆍ신부로 분장한 사람을 태우고서 놀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만한 사람이 없어 태우지는 못하지만 초례는 그대로 하고 있다.

이렇게 줄예맞이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남자는 당산할머니 위쪽에 위치한 할아버지줄을, 여자는 당산할머니 아래쪽에 위치한 여자줄을 잡아당기거나 윗동네ㆍ아랫동네로 나뉘어서 한다. 그러나 지금은 주로 할아버지줄은 남자들이 잡고, 할머니줄은 여자들이 잡아당긴다.

줄다리기는 세 번을 하는데, 여자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하여 여자가 두 번을 이기게 된다. 이렇게 줄다리기가 끝나면 곧바로 당산할머니 앞으로 가서 입석에 줄을 감아 놓는다. 이때 굿을 치면서 마을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놀게 된다. 줄은 할머니줄을 먼저 감고 할아버지줄은 나중에 감는다. 그리고 머리부터 감아서 꼬리로 끝이 난다. 이는 밑이 넓어야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줄예맞이, 줄다리기 그리고 줄감기가 끝나면 풍물을 치는 마을 사람들이 집집마다 돌면서 걸립을 했다. 마을 자금은 마련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모든 집들의 평안과 재액을 막아 주기 위한 것으로, 마을 사람들은 이를 ‘지신밟기’라고 하였다. 그러나 가평마을 역시도 점차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2000년경부터는 지신밟기를 하지 않고 있다. 이는 마을 사람들의 의지가 약해서만은 아니다. 더불어서 함께할 이들이 점차 줄어들면서 자연스레 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간혹 지신밟기를 해 달라고 요구하는 집이 있으면 줄다리기가 끝난 뒤에 해 주기도 한다. 또한 근래에는 지신밟기를 하지 않아도 마을 사람들이나 출향 인사들이 찾아와 마을을 위한 희사금을 놓고 가기 때문에 그나마 하지 않고 있다.

[정보제공]

  • •  고남규(남, 1934년생, 신림면 가평리 가평마을 이장)
  • •  고복상(남, 1938년생, 신림면 가평리 가평마을 주민, 고색창연테마마을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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