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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31091
한자 徐廷柱
영어공식명칭 Seo Jeongju
이칭/별칭 미당(未堂),궁발(窮髮),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미당길 16[선운리 578]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병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5년 5월 18일연표보기 - 서정주 출생
몰년 시기/일시 2000년 12월 24일연표보기 - 서정주 사망
출생지 미당 서정주 생가 -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미당길 16[선운리 578]지도보기
묘소|단소 서정주 묘소 -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송현리 안현지도보기
성격 시인
성별
본관 달성
대표 관직|경력 세계시인협회장|동국대학교 교수

[정의]

전라북도 고창 출신의 시인.

[개설]

서정주(徐廷柱)는 탁월한 언어 감각과 누구도 밟아 보지 못한 토속어로 일군 빼어난 시의 미학을 보여 준 언어의 연금술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는 친일문학을, 이승만과 전두환의 독재 시절에는 독재를 미화하는 글을 써 기회주의적 어용 문인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미당의 아버지 서광한은 무장에서 향시를 보아 장원을 하였고, 1909년 일제가 토지를 측량하기 위해 조선인 측량사들을 대거 뽑아 교육하였을 때 무장현을 측량하는 기사가 되었다. 이후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가 서광한을 농장의 마름으로 앉혔다고 한다.

[활동 사항]

서정주의 본관은 달성(達城), 호는 미당(未堂)이다.1915년 5월 18일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미당길 16[선운리 578]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고향의 서당에서 공부한 후 1925년 줄포공립보통학교를 수료하고, 1929년 김성수를 따라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같은 해 11월 광주항일학생운동 동조 시위에 가담하여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었다. 1930년 광주항일학생운동 1주년 기념 학생운동을 주모하여 구속되어 퇴학당하였다.

1931년 아버지 서광한이 서정주고창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시켰으나 백지동맹사건을 주동해 또다시 퇴학을 당하였다. 서광한은 아들을 위해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월곡리 하월마을 대밭에 초당이 있는 넓은 집을 사 주었고, 서정주는 이곳에서 광복이 되던 1945년까지 주로 머물렀다. 이 기간 고창고등보통학교 교사 홍순복이 서정주를 문학평론가 이헌구에게 소개했고, 서정주는 193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서정주는 정신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낭만주의 영향으로 시대의 이단자가 되어 서울시 마포구 도화동의 홍등가에서 넝마주이[일명 양아치]가 되었다.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에 있는 개암사 승려 박헌영은 이런 서정주를 불러 공부를 시키고자 신석정과 함께 불교전문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서정주는 곧 휴학하고 청계천 밑에서 진짜로 넝마주이가 되었다. 당시 서정주는 서울에서 소학교 교사인 여성을 짝사랑하여 편지를 자주 썼으나, 그 여성은 서정주를 상대해 주지 않았다. 이것이 동기가 되어 「문둥이」라는 작품을 쓰게 되었다.

서정주는 고창의 청년들인 김방수, 박영기, 김판순, 박영순, 김용환 등이 민족사상을 고취할 만한 연극 시나리오를 요청하여 써 주었다. 김방수 등은 고창 군내를 순회하며 공연을 하였는데, 성송에서 경찰의 급습으로 붙잡혀 광복이 될 때까지 군산형무소에서 수감되었다. 1940년 서광한은 서정주에게 공무원 시험을 보라고 하였다. 이 후 서정주고창군청 내무과에 합격했으나 반년 만에 사직하였다. 당시 서정주는 양복과 이상한 안경[한쪽은 파란색, 다른 한쪽의 반쪽은 빨갛고 반쪽은 노란색 안경]을 쓰고 벚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들고 뒤로는 3m나 기다란 명주 수건을 늘어뜨리고 다녔다. 이를 본 고창군수가 혼을 내자 대들고 사직서를 제출하였던 것이다.

당시 서정주는 일본인 경찰 이하라의 도움으로 일본군의 무용담이나 활동 및 시설을 취재하는 총독부의 촉탁 기자로 잠시 활동하였다. 6·25전쟁 당시 전주북중학교에서 국어 강사로 활동하다가 조선대학교 박철웅이 국문과 강사로 초빙해 광주[현 광주광역시]에서 10년 동안 생활하였다.

1981년 초 제12대 대통령 선거전이 시작되자 서정주는 전두환 후보의 찬조 연설자로 나섰고, 이를 계기로 전두환은 서정주를 세계시인협회 회장으로 앉혀 세계 일주를 시키면서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이후 서정주는 조선대학교를 그만두고 서울시 서대문구 공덕동에서 살면서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여생을 보냈다.

1992년 서정주는 월간 『시와 시학』에서 자신의 친일 행적과 관련하여 “국민 총동원령의 강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 문학을 썼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고백하였다. 서정주는 일찍이 “일본이 그렇게 쉽게 항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못 가도 몇백 년은 갈 줄 알았다.”는 고백을 한 적도 있다.

서정주는 이승만 정권과의 유착뿐 아니라 1980년대 전두환 신군부와도 유착하였는데,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축시를 헌사하고, 광주민주항쟁 이후 방송에 출연해 군사정권에 대한 지지 발언 등으로 일제와 독재정권 주변을 맴돌며 권력과 야합한 인물로 지탄받고 있다.

[학문과 저술]

서정주의 시집으로 제1시집 『화사집(花蛇集)』[1941년, 24편], 제2시집 『귀촉도(歸蜀途)』[1948년, 24편], 제3시집 『서정주 시선(徐廷柱 詩選)』[1956년, 20편], 제4시집 『신라초(新羅抄)』[1960년, 38편], 제5시집 『동천(冬天)』[1968년, 50편], 제6시집 『질마재 신화(神話)』[1975년, 45편], 제7시집 『떠돌이의 시(詩)』[1976년, 59편], 제8시집 『서(西)으로 가는 달처럼……』[1980년, 116편], 제9시집 『학(鶴)이 울고 간 날들의 시(詩)』[1982년, 113편], 제10시집 『안 잊히는 일들』[1983년, 92편], 제11시집 『노래』[1984년, 56편], 제12시집 『팔할이 바람』[1988년, 51편], 제13시집 『산시(山詩)』[1991년, 91편], 제14시집 『늙은 떠돌이의 시(詩)』[1993년, 72편], 제15시집 『80 소년 떠돌이의 시(詩)』[1997년, 48편] 등이 있다.

[묘소]

서정주 묘소는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송현리 안현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86년 동국문화상을 수상하였다.1987년 제22회 5.16민족상을 수상하였다. 2000년 대한민국문학상, 대한민국 예술원상, 자유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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