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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빈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31084
한자 金贇吉
영어공식명칭 Kim Bingil
이칭/별칭 죽강(竹岡),양혜(襄惠)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신월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병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몰년 시기/일시 1410년연표보기 - 김빈길 사망
출생지 순천도호부 -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옥산리
거주|이주지 고창현 경방동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신월리지도보기
묘소|단소 양혜공 김빈길의 묘역 -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부곡리 증산지도보기
성격 무신
성별
본관 고성
대표 관직 증우의정

[정의]

조선 전기 전라북도 고창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대건(大健), 호는 죽강(竹岡). 할아버지는 고려조의 대신으로 공훈을 세워 낙천군(洛川君)에 봉해진 김수(金隨)이고, 아버지는 직제학을 지낸 김미(金彌)이다. 어머니는 개성소윤을 지낸 정길(丁佶)의 딸 나주 정씨(羅州 丁氏)이다. 슬하에 김원량(金原亮), 김희량(金希亮), 김문량(金文亮) 삼 형제를 두었다.

[활동 사항]

김빈길(金贇吉)은 승주군 낙안면 낙생동[현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옥산리]에서 태어났다. 고려 후기 이성계 휘하에서 왜구를 격퇴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1394년(태조 3) 전라수군첨절제사(全羅水軍僉節制使)로 있을 때 만호 김윤검(金允劍), 김문발(金文發) 등과 함께 왜적의 배 3척을 물리쳤다. 같은 해 투항했던 왜인이 도망쳐 국문을 당하고 유배를 당하였다. 이때 우정승 김사형(金士衡)과 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이 그 죄를 감해 주기를 청하여 다시 수군(水軍)에 편입되었다. 1397년 순천 낙안에 토성[낙안읍성]을 쌓고 왜구를 막았다. 1405년(태종 5) 전라도수군도절제사가 되자 전라도 내 요해처(要害處)에 만호(萬戶)를 두고, 병선(兵船)을 나누어 정박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여러 섬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조정의 지원만으로 군비를 비축하던 폐단을 없앴다.

김빈길은 충직하고 근검하였으며 수전(水戰)에 능하였다. 병든 군사가 있으면 마음을 다하여 치료해 주고, 추위에 언 자가 있으면 자신의 옷이라도 벗어 입혀 주었으며, 항상 사졸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하였다. 전선을 이끌고 왜구를 쫓을 때에는 몸을 돌보지 않았으니, 군사들이 사력을 다하지 않는 자가 없어 항시 전투에 이겼다. 매사 상을 받으면 군사들 중 공이 있는 자에게 나누어 주었다.

김빈길은 1410년(태종 10) 고창현 경방동[현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신월리 경방]으로 이거하였는데, 세곡선과 상선이 정박하는 흥덕 사진포[현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에 왜구가 침입하자 늙은 몸을 이끌고 나가 전공을 세우고 순절하였다.

[묘소]

양혜공 김빈길의 묘역은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부곡리에 있으며, 2009년 12월 28일 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8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김빈길이 순절하자 태종이 예관을 보내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도록 하고, 이듬해 7월 우의정에 추증하고 양혜(襄惠)라는 시호와 공신녹권인 『단서철권(丹書鐵券)』을 내렸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0.12.21 상훈과 추모 수정 김빈길이 순절하자 태종이 예관을 보내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도록 하고, 다음해 7월 우의정에 추증하고 양혜(襄惠)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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