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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31025
한자 高敞東學農民革命- 位相- 東學農民革命-
영어공식명칭 Gochang Donghak Peasant Revoluti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신순철

[정의]

1894년 전라북도 고창군 지역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진짜 이야기 들여다 보기.

[개설]

고창군 무장 지역에서의 농민 봉기는 고을 단위의 농민 봉기였던 고부 봉기가 국지성을 벗어나 전국적인 농민 봉기로 가는 출발점이 되어 주었다. 따라서 본격적인 동학농민혁명은 현재 고창군에 속하는 무장현에서의 농민 봉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고창 지역은 전봉준 생가, 무장기포지, 손화중 도소 터 등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한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어 동학농민혁명의 메카로 자리 잡고 있다. 고창군에서는 반봉건, 반외세를 외치며 개혁을 요구했던 동학농민혁명군의 정신을 기리고 알리기 위하여 여러 가지 기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왜 고창인가?]

동학농민혁명 은 정읍의 고부 농민 봉기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왔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동학농민혁명 연구자들은 지난 15여 년을 끌어 왔던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제정 논의 과정에서 고창의 무장기포일[3월 21일]을 동학농민혁명 기념일로 정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

동학농민혁명 전 과정에서 고창 지역 농민들의 봉기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고 농민군 지도자도 많지 않았다. 또 고창 지역에서 대규모 전투가 일어난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왜 고창의 무장기포일은 중요한 것일까?

그 답은 바로 고부 봉기와 무장기포에 모인 농민들의 구성이 현저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두 사건은 같은 농민 봉기지만, 고부 봉기의 구성원들은 고부 지역 농민들이었던 데 비해 무장에 모였던 사람들은 전라도 각 고을에서 온 농민들이었다는 점이다.

조선에서는 ‘민란’이라고 부르는 농민 봉기가 많이 일어났다. 특히 19세기는 ‘민란의 세기’라 불릴 만큼 1860년대 이후 70여 개 고을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들 농민 봉기는 각 고을 단위의 국지성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봉기한 농민들이 고을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역모, 즉 반역으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또한 고을 수령을 고을 경계 밖으로 쫓아낼 수는 있어도 죽이는 것은 반역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수령을 죽이는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고부 지역 농민 봉기 과정에서는 이 부분이 주요 이슈가 되기도 하였다. 1,000여 명의 농민들이 백산에 진을 치고 있을 당시 일부 농민들이 함열에 있는 조창을 공격하여 세곡을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자고 주장하였으나 실행하지는 못했는데, 이는 고을의 경계를 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고부에서의 농민 봉기 양상은 종래의 농민 봉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부 지역 농민들은 후임 군수 박원명의 설득으로 3월 초 해산하였다. 그러나 안핵사로 온 장흥부사 이용태의 만행으로 인해 사건의 양상은 종래의 ‘민란’ 수준에서 ‘전국적인 농민 항쟁’으로 한 단계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여건을 고려할 때 무장에서의 농민 봉기는 고을 단위의 농민 봉기였던 고부 봉기가 국지성을 벗어나 전국적인 농민 봉기로 가는 출발점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본격적인 동학농민혁명은 현재 고창군에 속하는 무장현에서의 농민 봉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은 무장기포에서 출발한 것이다.

[왜 하필 무장인가?]

1894년(고종 31) 고창군은 무장, 흥덕, 고창으로 나뉘어 있었다. 전라도는 55개 군현으로 이루어져 있다가 갑오년 이듬해인 1895년 전라남도, 전라북도로 나뉘었고,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전라북도는 현재의 13개 시군으로 통합되었다. 고창 지역은 잠시 전라남도에 속한 적도 있었지만, 무장현흥덕현, 고창현이 고창군으로 통합되고 군청 소재지가 고창에 자리하면서 무장과 흥덕은 면으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당시 이 세 고을 가운데 가장 큰 고을은 무장이었다.

무장은 인구나 토지 면적으로도 흥덕이나 고창의 두세 배 정도 되는 큰 고을이었을 뿐 아니라 인근에 서해안 법성포로 연결되는 석교포가 가깝고 큰 장터인 개갑장이 인접한 곳이었다. 석교포는 대동창(大同倉)이 있어 호남 일대 세곡을 한양으로 실어 나르는 포구로서 법성포 내항이나 다름없었다. 1918년 이래 일본인에 의한 간척공사로 해로 교통이 단절되면서 개갑장도 사라져서 현재는 장터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으나 조선 후기와 개항기 무장 지역은 세곡을 실어 나르는 석교포와 법성포, 개갑장으로 연결되는 주요 거점이어서 물산과 정보가 집결하였다.

한편, 갑오년인 1894년 당시 무장에는 손화중이 동학 대접주로 있었고 따르는 교도들이 많았다. 손화중포(孫化中包)는 1892년(고종 29) 선운사 도솔암의 석불비결을 탈취하여 동학이 이른바 새로운 세상의 중심이 될 것임을 과시한 바 있었다. 지금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에 있던 손화중의 도소는 무장 땅이었다. 고부 봉기 세력이 해산한 3월 초 전봉준은 김개남과 함께 손화중이 있는 무장으로 피신해 있었는데, 고부에 안핵사로 파견된 장흥부사 이용태와 그 군졸들이 농민들을 수탈하는 모습을 보면서 세 사람은 재봉기의 필요성에 공감하였다.

전봉준손화중, 김개남 3인은 현재의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당산마을에서 호남 각 고을의 농민들을 모아 조련하고 3월 21일 「무장포고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흥덕, 고창을 거쳐 부안 백산에서 동학농민혁명군의 대오를 편성하였다. 이들은 고부 태인을 장악하고 황토현에서 전라감영군과 민보군의 공격을 받았으나 역습으로 대승을 거둔 후 남진하여 나주, 영광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장성에서 양호초토사 홍계훈(洪啓薰)이 이끄는 정예군과 황룡강에서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동학농민혁명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고 단숨에 북진하여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이렇듯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의 무장 봉기는 19세기 민란의 국지성을 벗어나 조선 정부와 맞서게 됨으로써 본격적인 농민 혁명 단계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전봉준의 출생지 당촌마을]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에 있는 전봉준 고택이 한동안 전봉준의 생가로 알려져 전라북도 문화재로 지정되는 해프닝도 있었으나, 전봉준의 출생지는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이다. 전봉준의 출생지를 확인하는 데에도 70년 이상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는 사실은 동학농민혁명의 진실을 밝히는 게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전봉준고창군 죽림리 당촌마을에서 태어나 10대 초반까지 어린 시절을 보냈다. 13세 되던 1867년(고종 4) 무렵 아버지를 따라 고부, 태인 등지로 여러 번 이사를 다니다가 1894년이 되기 몇 해 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에 들어와서 살게 된 것이다. 그동안 전봉준의 출생지에 관한 문헌 기록과 촌로들의 증언이 제각각이어서 여러 주장들이 있었지만 천안 전씨 문효공파의 족보 및 문헌 자료와 구술 등을 종합한 결과 전봉준의 출생지는 고창군 죽림리 당촌마을로 확인되었다.

전봉준손화중 이외에도 고창 지역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로 고창현, 무장현, 흥덕현에 걸쳐 오하영·오시영·임형노·임천서·홍낙관·홍계관·손여옥·송경찬·강경중·송문수·송진호·정백현·장두일·곽창근·고영숙·고태국·서상옥 등이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의 그림 맞추기]

불과 13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동학농민혁명은 아직까지 당시의 진실을 다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이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사건에 대한 진실을 다 밝혀 내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갑오년인 1894년 봄 전주성이 동학농민혁명군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사실과 전라도 각 군현에 집강소가 설치되어 수령과 동학농민혁명군 세력이 함께 업무를 처결한다는 소식은 조선의 8도 각 고을의 지배계층은 물론 일반 백성들에게도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아울러 충청도와 경상도는 물론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에서까지 농민 봉기를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더욱이 9월 재봉기는 우리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항일 농민 봉기로서, 당시 동학농민혁명군 진영에서는 각 지역 감사와 수령, 관군들에게 항일 연합전선을 구축하자고 제안할 정도로 동학농민혁명군이 가진 위상은 막강하였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수만을 헤아리는 농민군을 이끈 다수의 농민군 지도자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특히 10월에 이르러서는 전라도 남동부 지역[순천, 광양, 흥양], 충청도 내포 지역[서산, 태안, 예산, 홍성]과 동부 지역[보은, 옥천, 황간], 경상도 북부 지역[상주, 예천, 선산, 김산, 성주]과 서남부 지역[진주, 산청, 하동, 고성], 강원도 지역[홍천, 강릉], 황해도 지역[해주, 강령, 평산] 등에서 농민들이 대규모로 봉기하여 인접 군현을 점령하고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각 지역마다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또한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의 지도자가 체포된 이후에도 전라도 장흥의 석대들에서는 3만 명의 농민들이 봉기하여 장흥성을 점령했고, 보은 북실과 대둔산에서는 이듬해까지도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런데도 우리가 알고 있는 동학농민혁명의 그림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하는 농민군 주력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많은 사람들이 우금치 전투에서의 패배로 갑오년의 동학농민혁명은 끝났다고 알고 있다. 우리가 그동안 이러한 그림만을 보며 갑오년을 이해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한 사람들이나 그 가족들은 모두 반역자로 낙인찍혔기에 숨어서 살 수밖에 없었고, 그 어떤 기록도 남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동학농민혁명을 전봉준의 부친에 대한 원한에서 비롯된 사건이라거나 동학이라는 삿된 무리들의 반란으로 치부했던 조선왕조 지배층의 역사 인식, 이 사건을 자기 권력의 정당화에 이용하기 위해 전라도나 정읍의 국지적인 사건으로 가두어 두었던 군부 독재 권력의 정치적 목적이 사건의 참된 그림을 그리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 은 사건이 발생하고 100여 년이 지나면서 진실이 드러나고 있다. 전봉준과 호남 농민군 중심의 동학농민혁명 상(像)은 전국적인 농민 혁명으로 거의 바뀌었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을 그린 그림의 완성도가 높아질수록 고창의 위상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고창의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전봉준의 출생지가 고창 지역이라는 사실과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무장기포의 역사적 의의가 제대로 밝혀지는 데는 100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고창 사람들이 동학농민혁명을 기억하고 기념하고자 나선 것은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 가까워진 1990년대 초반의 일이다.

1993년 민간단체인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조직되고 그해 ‘무장기포 100주년 기념학술회의’와 이듬해 3월 ‘무장기포재현 걷기대회’, ‘농민군 위령제’ 등을 개최하며 고창 동학농민혁명을 재조명하고 기념하였다. 이후 2008년 고창군은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지원조례」를 제정하고 각종 기념사업을 적극 지원하였다. 2020년 6월 현재 고창군은 문화복지환경국 산하 문화예술과에 동학인문팀[4명]을 두어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고창군과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지난 28년간 민관 합동으로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하기 위해 벌인 기념사업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 무장기포의 지역 축제화를 위한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기념제와 무장읍성축제’를 매년 진행하고 있으며, 학술 사업으로 매년 학술 세미나 개최와 단행본 발간 사업, ‘녹두대상’을 제정하여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공로 단체나 개인에 대한 시상을 진행하고 있다.

교육 사업으로는 2008년부터 시민 교양교육 프로그램으로 ‘녹두교실’을 운영하면서 스터디 그룹을 통해 동학농민혁명 관련 시민교육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또 초중등 학생들을 대상으로 유적지 현장 답사와 캠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2019년 한 해에만 교육 및 답사 프로그램 이수자가 3,967명에 이른다.

한편, 고창군은 고창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성지화 사업의 일환으로 ‘무장기포지’와 ‘전봉준 생가’의 문화재 지정에 필요한 각종 학술조사와 토론회, 성지화 사업 용역을 진행하고 있다. 고창군은 무장기포지동학농민혁명 유적지의 랜드마크가 될 뿐 아니라 세계적인 역사 유적지로서도 손색이 없는 공간으로 조성해야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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