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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1200
한자 松陽祠
영어음역 Songyangsa
영어의미역 Songyangsa Shrine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 송산리 산 26[해리송산길 118-30]|송산리 32-1[해리송산길 118-28]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최범호황금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당
양식 맞배지붕
건립시기/일시 일제강점기
정면칸수 3칸
측면칸수 2칸
소재지 주소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 송산리 산 26[해리송산길 118-30]|송산리 32-1[해리송산길 118-28]지도보기
소유자 창녕성씨 송호공영일 만취공경수파 문중
문화재 지정번호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3호
문화재 지정일 2000년 6월 23일연표보기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 송산리에 있는 성사달(成士達), 성부(成溥), 성여원(成汝源), 성무조(成武祚), 성경수(成卿修)를 배향하는 일제 강점기 사당.

[개설]

송양사창녕성씨(昌寧成氏)의 사우(祠宇)로, 성사달(成士達)을 주벽으로 하여, 성부(成溥), 성여원(成汝源), 성무조(成武祚), 성경수(成卿修)를 배향하고 있다. 성사달[?~1380]은 고려 공민왕 때의 공신으로,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이암(易庵)이고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성한필(成漢弼)의 현손(玄孫)이며, 군수를 지낸 성언신(成彦臣)의 아들이다.

1341년(충혜왕 2)에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사성(翰林司成)을 지냈다. 1352년(공민왕 1)에 대호군으로 정방(政房)에서 사사로이 벼슬 40여 건을 수여하였다는 죄명으로 하옥되었다가 얼마 뒤 복직되었다. 1362년(공민왕 11)에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좌대언지신사(左代言知申事)로 왕을 호종(扈從)하여 호종일등공신(扈從一等功臣)에 올라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에 봉해지고,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다.

다음해 공민왕이 흥왕사(興王寺)에서 논공행상을 할 때, 그 공으로 추충협익공신(推忠協翊功臣)이 되었으며, 이 해에 김용(金鏞)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일등공신으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었다. 1364년(공민왕 13)에 교주도병마사(交州道兵馬使)가 되었을 때 여진(女眞)의 삼선(三善), 삼개(三介) 등이 홀면(忽面)[현 홍원], 삼철(三撤)[현 배청]에 침입했을 때 정병 500인을 거느리고 나아가 적들을 물리쳐 함주(咸州)와 화주(和州)를 회복하였다.

전투에서 돌아와서는 춘추관사(春秋館事),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냈다. 1371년(공민왕 20)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명나라 황제에게 천출기재(天出奇才)라는 칭송을 들었으며, 더불어 역암(易菴)이라는 호를 받았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특히 개성의 남대문종명(南大門鐘銘)과 연복사종명(演福寺鐘銘)은 뛰어난 필치이다.

성부는 고려 후기 문신으로, 호는 미산(眉山)이며, 성사달의 아들이다. 정몽주의 문인으로 두문동(杜門洞) 72인 중 한 사람이다. 1383년(우왕 9)에 문과에 올라 형부총랑(刑部摠郞)을 지내고,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두문자정(杜門自靖)하였다. 이성계가 대사헌으로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태종 이방원이 동방급제(同榜及第)한 정의로 예우를 극진히 하면서 불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조견(趙狷), 남을진(南乙珍)과 함께 유양삼은(維楊三隱)이라 불린다.

성여원은 조선 인조 때 의사(義士)로, 호는 와탄(臥灘)이고 성부의 6대손으로, 1576년(선조 9)에 출생하였다.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충효가 지극하고 조행(操行)이 순후(醇厚)하여 스승에게서 칭송을 받았다. 인조 때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이조좌랑(吏曹佐郞)을 지냈다. 이괄의 난에 왕이 공주로 몽진하자 신유일(辛惟一), 강시매(姜時邁) 등과 여러 고을에 격문을 띄워 군사를 모집하고 군량을 모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내려다가 난이 평정되자 곡식을 관가에 납입하고 돌아왔다.

성무조는 조선 후기 효자로 자는 군경(君敬), 호는 송재(松齋)이며, 성여원의 6대손으로, 1778년(정조 2)에 출생하였다. 천성이 순효(純孝)하여 부친이 병에 걸리자 하늘에 빌고 사당에 빌면서, 지혈(指血)로 회생시켰다가 운명하니 상을 치르는 데 예를 다하였고, 모친상을 당하자 죽을 먹으며 시묘살이를 하였다. 독서를 즐겨 학문을 일찍 성취하였고 청류재(聽流齋)에 은거하면서 고을의 자제를 가르쳐 문하에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1892년(고종 29)에 효자로 천거되어 조봉대부 동몽교관(朝奉大夫童蒙敎官)에 증직되었고, 이듬해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성경수는 개항기의 효자로 자는 보현(輔賢)이고, 호는 만취(晩翠)이며, 성무조의 증손으로 1875년(고종 12)에 출생하였다. 기삼연(奇三衍)의 문인으로 용모가 단정하고 천성이 돈후정직(敦厚正直)하였다. 기우만과 함께 학문을 익혀 경학과 예학에 깊었으며 조행(操行)이 순후(醇厚)하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정사(精舍)를 지어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 봉양에 정성을 다했으며, 부모의 병환에 수년 동안 몸소 수발하여 더러움을 남에게 보이지 않았고, 상을 당하자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조석(朝夕)의 졸곡(卒哭)과 삭망(朔望)의 성묘를 힘써 행하였다. 또한 의병에 참여하고자 하였으나 나이가 어리고 부모를 봉양해야 한다는 주위의 권고로 돌아와 의연금(義捐金)과 의곡(義穀)을 의병청에 보냈다.

[위치]

송양사는 상송마을에서 남쪽 길로 내려오다 경로회관을 지나 산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산 아래 중턱에 위치해 있다.

[변천]

1928년 2월에 착공하였으며, 중·개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형태]

상송마을 서북남쪽 산봉우리에 대지 992㎡에 건평 165㎡의 기와집 3채가 있다. 사당 건물은 앞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붕은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앞뒤 기둥은 둥근기둥이고, 중간에는 네모기둥을 거칠게 다듬은 화강암 위에 세워놓았다. 14단의 계단 위에 세운 경현당과 2층 누각인 풍욕루(風浴樓)가 있다.

[현황]

음력 3월 10일에 시제를 지낸다. 제주는 창녕성씨 직계 자손으로 부정이 없는 남자이며, 종중의 성씨 유림들이 참석한다. 제수와 상차림은 보통 제사와 같으나 돼지머리, 쌀, 생선 등을 익히지 않은 채 생식으로 상을 차린다. 제의 절차는 유교 제례법에 따라 지낸다. 일 년에 한 차례 시제를 지내는 것 이외에도 매월 초하루에 문안 인사를 드린다. 2000년 6월 23일에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3호로 지정되었다. 2005년 8월에 사당과 부속 건물인 경현당의 문 여덟 짝을 도난당하기도 하였다.

건물은 관리가 잘 되고 있으나 정면의 안내판이 훼손되어 설명문을 읽을 수 없으며, 문이 잠겨 있어 일반인들이 내부를 참관하기가 쉽지 않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