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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1109
한자 農民運動
영어음역 Nongmin Undong
영어의미역 Peasant Movement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최정기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지역에서 농민이 그들의 생활 조건, 또는 사회적 환경의 개선을 위해 전개한 사회 운동.

[개설]

일반적으로 농민 운동은 노동 운동과 같이 계급으로서의 농민이 스스로의 노동 조건과 경영 조건의 유지·개선·확장 또는 사회·정치적 생활 조건의 유지·향상을 위해 단결해서 행동하는 조직적 투쟁을 말한다. 넓은 의미로는 흔히 농민조합운동, 농촌갱생운동, 농촌청년운동 등을 포함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농민의 계급 투쟁을 지칭하기도 한다.

한국에서의 대표적인 농민 운동으로는 조직적인 운동이 되지 못하여 실패로 끝난 구한말의 동학 농민 혁명(東學農民革命)과 동학 농민 혁명의 역사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으로 활발하게 전개된 일제 강점기의 농민 운동들 등을 들 수 있다.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도 농민 운동은 비교적 활발하게 전개된 편이었다.

[일제 강점기 농민 운동]

구한말 전국적인 농민 운동은 우선 왕실의 지주권 강화에 대한 저항의 형태로 나타났다. 즉 동학 농민 혁명과 갑오경장이라는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면서 농민들은 토지에 대한 왕실의 소유권이 다시금 대두되자 이에 대한 저항 형태로 산발적으로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화 한데 이어 식민지로부터 값싼 쌀을 확보하여 자국의 공업화를 위한 안정적인 기반으로 삼고자 하는 정책의 대상지로 선정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농민 운동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1918년 전라북도 전체 경지의 21%를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당시 전국 경지에 대한 일본인의 소유율은 5.4%] 당시 이 지역 농민운동의 객관적 조건을 잘 설명해 주는 지표가 된다.

일제의 수탈에 저항하는 농민 운동은 크게 두 가지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첫째는 소작 쟁의의 형태였으며, 둘째는 수리조합 반대 운동의 형태였다. 우선 소작 쟁의의 경우 1920년대 말에 이르러 전라북도 지역의 쟁의 건수가 급증하여 전라남도 지역과 함께 전국에서 쟁의를 가장 많이 일으키는 지역이 되었다.

당시 소작 쟁의의 주된 특징들은 첫째 쟁의의 주된 내용이 소작권 이동에 관한 것이었고, 둘째 쟁의가 발생하는 지역은 주로 일본인 소유의 농장이었으며, 셋째 소작 쟁의의 형태가 주로 시위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일시적으로 소작료 불납동맹을 결성하기도 했으며, 그 가운데 몇 차례는 폭력적 충돌로 인한 부상자 및 구속자가 나오기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음으로 수리조합 반대 운동은 보다 복잡한 형태로 나타났다. 원래 수리조합은 토지 개량 사업의 일환으로 농업 생산성을 증대시키는데 목적을 두고 설립되었다. 그러나 수리조합은 일반 농민보다는 지주의 이익을 옹호하고 식민지 지주제를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기능했던 까닭에 농민들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즉 수리조합의 결성 자체가 대지주의 일방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리조합의 결성과 함께 소작료의 대폭적인 인상이 단행되어 부담이 일반 농가에 전가됨으로써 농민들의 빈곤화가 더욱 증폭되었기 때문이었다.

1924년 8월 고창군 공음면 두암리에서 700여 명의 농민들에 의해 벌어진 수리조합 반대투쟁은 고창군의 대표적인 수리조합 반대 운동이었다. 당시 공음면에서는 수리조합을 만들면 세금을 비싸게 물게 된다고 속여 싼값에 많은 땅을 사들인 사기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에 대해 농민들이 격렬히 항의함으로써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고창 지역에는 이러한 투쟁을 이끌었던 소작인 단체 등 14개의 농민운동 단체가 결성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80년대 이후의 농민 운동]

1987년 8월 12일 고창군 해리면심원면 농민 200여 명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에 소재한 삼양사 건물 4층에서 농성을 시작하였다. 농민들은 삼양사가 소유하고 있는 고창군 일대 2.71㎢의 농지를 1940년도부터 경작했으며 따라서 1949년 농지 개혁 과정에 자신들에게 불하되었어야 했던 토지라며 현 경작 농민에게 이 농지를 양도할 것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간 것이었다.

농성은 한 달 가까이 이어졌고 농성 과정에서 지원 투쟁에 나선 학생들이 구속되는 등 사회적 이슈가 되었으며, 김수환 추기경이 농성 현장에 김승훈 정의구현사제단 신부와 이돈명 변호사를 파견해 원만한 사태 해결을 요청할 정도였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11일 삼양사측이 소작 농민들에게 정부 고시 가격인 3.3058㎡당 1,881원에 2.9㎢의 농지를 양도하기로 합의하면서 농성이 일단락되었다.

1987년 민주화 대투쟁 시기 진행된 삼양사 소작 쟁의 운동은 민주화라는 열린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소작 쟁의 운동으로서 당시 전개되었던 수많은 소작 쟁의 투쟁에서 유일하게 농지 양도라는 가시적 성과를 남긴 투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비록 무상 양도가 아닌 유상 양도의 형식이었지만 영광군 손불 지역이나 세종대와 관련된 평택 지역의 투쟁이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유일하게 성과를 남긴 농민운동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성공적인 투쟁은 당시 고창 지역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모색하고 있던 가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가 연합하여 지역 농민들의 투쟁을 지원했고 일부 양심적인 관료들[1957년 해리면장, 1987년 고창경찰서 정보과장]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투쟁은 잊혀 질 뻔했던 해방 전후 시기 삼양사의 농지 취득 과정을 지역민들에게 일깨워준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그 성과는 1989년 수세 싸움에도 이어졌다. 1980년대 농민운동의 대중적 폭발 위에서 농민운동의 조직화가 진전되었으며 그 조직적 결실은 고창군 농민회의 결성으로 연결되었다. 2010년 쌀값 보장과 농민 생존권 쟁취를 기치로 진행된 면 단위 농민회 총회가 7개면에서 개최되었다. 각 면별로 평균 150여 명이 참석하여 전체 1,000명이 넘는 농민들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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