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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017
한자 華表石柱-唯一-五巨里堂山-永遠-理想鄕-
영어의미역 The only Intersection with a Hwapyo Stone Pillar Erected Village Guarding Figure of Ogeo-ri and Its Timeless Utopia Story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송화섭

[개설]

고창읍에 조성된 오거리 당산은 동·서·남·북·중앙의 5방위에 당산을 조성한 것이다. 당산은 자연 입석과 조형 입석으로 세웠다. 상거리[문화재청 지정 명칭 중거리 할아버지당, 현 항목명 중거리 당산], 중거리[문화재청 지정 명칭 중앙동 할아버지당, 현 항목명 중앙 당산], 하거리[문화재청 지정 명칭 하거리 할아버지당, 현 항목명 진서화표 석주]당산은 조형 입석으로 당산을 삼았으며, 천북동과 교촌리 당산 은 자연 입석을 당산으로 삼았다. 조형 입석 가운데 하거리 당산은 진서화표의 명문이 있고, 중앙 당산은 미륵 당산으로 불교적 요소가 강하다. 반면에 자연 입석을 할아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의 당산 입석으로 삼은 것은 민간 신앙적 요소가 강하여 불교 신앙과 민간 신앙이 교섭된 오거리 당산이다. 오거리 당산은 화표를 당산 입석으로 삼은 유일한 당산이다. 정월 대보름날 줄다리기를 한 후 당산에 줄을 감아 놓는 전통이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전승되고 있다.

[1803년 고창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진서화표 석주에는 ‘진서화표가경팔년계해삼월일(鎭西華表嘉慶八年癸亥三月日)’이라고 쓰여 있고, 그 옆에는 ‘고창읍수구입석비(高敞邑水口立石碑)’라는 명문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가경 8년은 1803년 계해년이다. 계해년 해가 바뀌어 고창읍내 거주하는 주민들이 대규모로 도시 정비 사업을 벌인 것이다. 하거리 뿐만 아니라 상거리와 중거리에도 당산 석주를 세웠다. 처음 오거리 당산은 삼거리에서 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고창읍의 중심지에 위치한 상거리, 중거리, 하거리 당산이 모두 계해년에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긴 당간 석주 같은 화표주를 동시에 세운다는 것은 대규모의 토목 공사였다. 도시 정비 사업을 벌이면서 읍치 안정을 추구할 목적에서 종교적 상징물인 화표주를 세운 것이다.

그럼 왜 화표주를 세운 것일까. 18~19세기는 전국적으로 자연재해의 피해가 극심했다. 당시의 가장 빈번하였던 재해는 수재(水災)였다. 수재는 비가 너무 많이 내려 홍수로 물난리를 맞는 것을 말한다. 수재 다음으로 우박이 많이 내렸다. 이상 난동으로 우박이 여름철에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우박으로 논밭에 재배되는 농작물의 피해가 커 흉년을 맞이하는 일이 빈번하였으니 사람 살기가 매우 불안정하였다. 18세기 말에 수재, 한재(旱災), 우박 등의 발생 빈도가 높은 것은 전국적인 현상이었기에 고창만 예외일 수는 없었다. 흉년이 들면 기근으로 기사(饑死)가 속출하고, 주민들이 집을 떠나 유리걸식하고 다니며 생활 근거지 이탈로 마을의 공동화 현상이 생겨나는 연쇄적인 반응이 나타났다. 먹을 게 없으니 살기가 불안하고 살기 위하여 집을 떠나는 일이 다반사였던 것이다.

[화표는 삶의 터를 안정시키는 풍수 비보 장치물]

아마도 1800년경에 고창읍 전체가 수재로 인한 막대한 피해를 입은 것 같다. 방장산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큰물로 고창천이 범람하고 가옥이 침수되어 떠내려가는 홍수가 났다. 물난리가 나면 집과 가재도구가 큰물에 떠내려가거나 아예 물에 잠겨 버리는 피해를 보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폐화된 도시를 재정비하고 마을 안정의 상징물로서 화표를 세운 것이다. 화표는 풍수 비보(裨補) 기능을 하는 석주를 말한다. 고창은 풍수 지리적으로 터를 비보할 필요성이 있었다. 비보란 터가 센 곳은 눌러주고 허한 곳은 보완하는 것을 말한다. 고창읍이 물난리를 맞고서 풍수 비보의 원리를 도입하여 마을 안정에 이념적으로 활용하였다. 화표 석주는 중국에서 종종 볼 수 있는데, 국내에 화표 석주가 세워진 곳으로는 고창읍이 유일하다. 국내에서 고을의 터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당간이 세워진 곳은 나주, 담양, 청주, 안동, 부안 등지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화표가 조성된 것은 고창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수 비보 문화재라 할 수 있다.

1800년경에 고창읍이 자연재해로 재앙을 맞고 난 뒤에, 고창현 주민들이 머리를 맞대고 도시 재건과 재정비 작업을 추진하였다. 고창읍에 살고 있던 김성택(金聖澤), 차도평(車道平), 노귀연(魯貴連)이 나서서 화주(化主)의 역할을 맡았고, 김양봉(金陽鳳), 이명득(李明得), 차도욱(車道旭), 신광득(申光得) 등이 시주(施主)하여 삼거리에 화표 석주를 세우게 된 것이다. 삼거리 당산의 석주에는 “천년완골흘연진남계해삼월일(千年頑骨屹然鎭南癸亥三月日)”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계해년 3월에 세운 화표가 천년동안 완고한 뼈대로서 우뚝 솟은 채 남쪽을 진호하기를 간절하게 염원하면서 세운 것이다. 이로써 고창읍의 남쪽과 서쪽에 각각 화표주를 세워 고을의 터를 눌러 안정시키는 효과를 갖게 하였다. 그리고 중앙에 미륵당산의 화표주를 세워 도시 재정비 사업을 마무리 짓고 기념하는 화표 석주를 세웠다. 중거리 당산중앙 당산에는 시주자와 화주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처음에는 고창에 삼거리 당산이었으나 후대에 오거리 당산으로 확대되었다. 상거리, 중거리, 하거리 당산 입석과 교촌리와 천북동의 당산 입석은 다르다. 삼거리 당산 입석은 불교적인 영향을 받은 조형 입석인 반면, 교촌리와 천북동 당산 입석은 자연 입석으로 되어 있다. 교촌리와 북천리 당산 입석은 자연마을 단위의 당산 입석이지 풍수 비보 입석으로 세운 기념비적인 입석은 아니다. 두 곳의 자연마을 당산 입석을 오거리 당산 입석으로 편입시킨 뒤 최근 그곳에 진북화표(鎭北華表)를 세웠다. 진북화표는 삼거리 당산에서 오거리 당산으로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1803년 처음에는 고창현의 치소 중심으로 풍수 비보 입석을 세 곳에 세웠는데, 그 후에 인구 증가로 읍성 규모가 커지면서 교촌리와 북천리의 마을 당산이 고창읍 당산으로 편입되어 오거리 당산의 구조가 갖추어진 것이다.

[불교적 이상 세계의 현실화]

상거리, 중거리, 하거리 당산은 밀교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조형 입석이다. 밀교 문화재란 불교 문화재에 속하지만 민간 신앙의 성향이 강한 문화재를 말한다. 밀교는 불교의 민간 신앙 형태를 말한다. 상거리 당산은 석당(石幢)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며, 중앙 당산은 석장(石墻)의 모습을 보여 주고, 하거리 당산은 당간(幢竿)의 모습을 보여 주는데 약간은 이질적이다. 상거리와 하거리 당산은 석당간의 영향을 받았다면, 중거리 당산은 석장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특히 하거리 당산은 하나의 화강암을 다듬어서 석당간처럼 긴 장대석으로 화표 석주를 세워 놓았는데,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보기 힘든 간주석(竿柱石)이라고 할 수 있다. 부안과 담양, 나주 등의 석당간은 짧은 석주를 이음쇠로 연결시켜 세워 놓은 것인데, 고창읍 하거리 당산은 약 6m 정도로 긴 석주를 세워 놓았다. 그것만으로도 국보급의 입석문화재 가치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거리 당산은 기단은 석탑의 기단석 형식을 취했으며, 간주는 당간의 형식을 빌렸다. 간주 상부에는 보주 형태를 갖추었으며, 당번을 걸 수 있는 고리를 양쪽에 장식해 놓았다. 중거리 당산은 미륵당산이라고 부른다. 미륵당산을 갓당산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석장의 간주에 미륵불의 둥근 관석과 같은 원형 판석에 끼워 놓은 형태에서 비롯되어 나온 말이다. 중앙 당산은 석장의 기본형에 미륵불 신앙을 덧씌워 놓은 석주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석장은 무엇인가. 석장은 우리말로 돌돛대라고 칭한다. 돌돛대를 고창읍내에 조성한 것은 풍수 지리적으로 고창읍의 지형이 배형국이라는 뜻이다. 배형국은 행주형(行舟形) 지세를 의미한다. 주산의 계곡에서 내려온 물길이 좌우에서 고을을 에워싸고 흘러내려 가면서 고을 앞에서 합수하여 빠져나가는 모습이 마치 배가 항해하는 모습과 같다는 데서 붙여졌다. 한마디로 고창읍의 지세가 배형국이기에 돌돛대를 세운 것인데, 작은 돛단배가 아니라 거대한 함선처럼 무거운 석장을 고창읍 터에 강하게 짓눌러 세워 놓은 것이다.

석장 외에 화표석주를 진서(鎭西), 진남(鎭南)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진압용으로 세웠다. 배가 항해 도중 파선당하거나 좌초되지 않으려면 돛대가 꼿꼿하게 세워져 있어야 한다. 이 돌돛대를 미륵불로 형상화시킨 것이다. 미륵불은 인형상이어야 하지만 둥근 갓 형태의 판석을 끼워 놓고 미륵불로 섬긴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일석이조의 발상이다. 풍수 비보적인 돛대 기능과 정신문화적인 불상의 기능을 동시에 갖게 한 것이다.

[미륵 불국토의 세계를 꿈꾸며]

1803년경 고창읍 사람들은 삶에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먼저 큰물 재해를 당하여 고을의 집들이 싹쓸이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고을은 마치 전쟁을 겪어 처참하게 폐허화된 모습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허둥대고 먹고 살길이 막막하고 마치 종말이라도 온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뜻있는 고을 주민들이 화주자와 시주자로 나서서 도시 재정비와 고을 재건에 앞장을 섰다.

중거리 당산을 미륵당산으로 조성한 것도 이 때문이다. 미륵은 현세불이 아니라 미래불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을 때에 미륵불을 찾는다. 미륵은 중생들의 요구대로 시도 때도 없이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간절하게 염원해도 56억 7천만 년 후에나 온다는 미륵을 마치 현실에 내려온 것처럼 미륵불 형상을 석주로 만들어 놓았다. 미륵불은 오탁악세(五濁惡世)에 내려온다고 했는데, 얼마나 고창 고을 사람들이 절박했으면 미륵불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중앙에 미륵불을 모셨을까. 그만큼 삶의 위기의식을 강렬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미륵보살이 좌정하고 있는 도솔천 내원궁의 세계를 꿈꾸었다. 마치 현실에 미륵 불국토 세계를 구현해 놓고 현실의 극락세계를 꿈꾼 것이다. 마침내 1803년 고창 고을 주민들의 의지로 고창 고을에 미륵불을 출현시켰다.

고창 고을의 주민들은 매년 정월 대보름날에 상원절 연등회를 거행한다. 집집마다 처마에 연등을 내걸고 거리에도 연등을 달았다. 상거리 당산에서 중거리 당산을 거쳐 하거리 당산까지 줄을 연결하여 연등을 달았고, 당산 주변에도 연등을 환하게 밝혔다. 밤이 되면 온갖 다양한 연등에 불을 밝힌다. 미륵불이 고창 고을에 내려온 것을 축원하고, 극락세상으로 조성된 고창 고을을 지키기 위하여 불을 밝히는 연등행사를 지속하였다.

어디 그것뿐이랴. 도솔천 내원궁이 위치한 시두말성의 연못에 거처하는 천룡을 고창 고을로 강림시켜 고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민간 불교 의식을 장엄하게 거행하는 관행을 지속적으로 이어오고 있다. 고창 오거리 당산제가 그것이다. 정월 보름날 밤 연등불 밝힌 시장 거리에서 주민들은 밤이 늦도록 미륵 불국토 세계의 구현을 기리면서 줄다리기를 즐겼다.

고을 사람들은 자기편의 대열에 끼어들어 용줄을 어깨에 메고 고을을 한 바퀴 돌고 난 뒤에 동편과 서편으로 편대를 구성하여 줄다리기를 하였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줄다리기에 동참하여 신바람이 났다. 늦은 밤 깊어가는 줄 모르고 훤하게 불을 밝힌 거리에서 용줄을 당기는 놀이를 즐겼다. 해마다 풍년이 들고 고을이 평안해지기를 소망하면서 가족들의 소원성취도 빌었다. 이 인연이 끊어지면 안 된다는 의식을 연대하여 지금도 고창에서는 매년 정월 대보름날 연중행사로 상원절 연등회와 줄다리기를 거행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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