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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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에 속하는 법정리. 계당리는 마을 앞을 흐르는 시내의 지형이 용이 잠긴 형국이라 ‘용계(龍溪)’로 불렸다. 진주정씨(晉州鄭氏) 정회찬(鄭悔燦)이 이주한 뒤 호를 따 ‘계당(溪堂)’이라고 불렀다. 형성 시기는 뚜렷하지 않으나, 고려 말 신천강씨(信川康氏)가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또한, 조선 중기 진주정씨 정회찬이 괴치마을에서 옮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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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계산리는 풍수지리상 마을 남쪽에 있는 산이 금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므로 계산(鷄山)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광산김씨가 피난하여 정착하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다. 조선 말기에는 고창군 산내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지산(芝山)·부정(釜鼎)·비석·사신·병암·내독 일부를 병합하여 계산리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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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두암리에 있는 녹색 농촌 체험 마을. 고창군의 서남에 위치한 공음면은 백제 시대에 상로현(上老縣)에 속해 있었으며, 신라 시대에는 상로현을 개칭한 장사현(長沙縣)에 속하였다가 1417년(태종 17) 무송현(茂松縣)과 장사현이 병합되어 무장현으로 예속되었다. 그 후 1914년 와공면과 동음치면이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공음(孔音)으로 개칭되었다. 고사리마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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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학전리에 있는 조선 전기 광산김씨 가문의 정려. 광산김씨 한 집안에서 4세에 걸쳐 다섯 사람이 효행으로,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그리고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남편을 뒤따랐던 열행으로 나라에서 각각 정려를 내렸다. 이는 조선 시대에도 보기 드문 집안이다. 증자헌대부 예조판서(贈資憲大夫禮曹判書) 김순(金純)은 부모상에 여묘하여 새와 백호가 감응하는 효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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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학전리에 있는 조선 전기 광산김씨 가문의 정려. 광산김씨 한 집안에서 4세에 걸쳐 다섯 사람이 효행으로,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그리고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남편을 뒤따랐던 열행으로 나라에서 각각 정려를 내렸다. 이는 조선 시대에도 보기 드문 집안이다. 증자헌대부 예조판서(贈資憲大夫禮曹判書) 김순(金純)은 부모상에 여묘하여 새와 백호가 감응하는 효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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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성을 시조로 하고 이부·이명걸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고창군 세거 성씨. 광주이씨는 신라에서 내사령(內史令)을 지낸 이자성(李自成)을 시조로 한다. 광주이씨 고창군 입향조인 이부(李斧)는 고려 말의 명신 둔촌(遁村) 이집(李集)의 7대손으로 1508년(중종 3)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에서 태어났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아버지 우천(牛泉) 이약수(李若水)가 정암 조광조(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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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장두리에 있는 개항기 광산김씨 김기두(金箕斗)의 정려. 광산김씨(光山金氏) 김기두의 부모에 대한 효성이 조정에 알려졌다. 김기두의 자는 경칠(景七)이며, 호는 장계(章溪)이다. 고창 지역에서 널리 알려진 김경희(金景熹)의 후손이다. 김기두는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고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학식이 높았다. 부친이 병에 걸리자 눈 속에서 싱싱한 채소를 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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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상평리에 있는 조선 전기 강학당. 김기서 강학당은 1548년경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는 전불사(典佛寺) 불당지라고 전하는 김기서 강학당을 세운 김기서는 광산인(光山人)으로, 자(字)는 시견(時見), 호는 돈목재(敦睦齋)로 조광조의 제자이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조광조와 신진사림(新進士林)들이 대거 숙청당하자 상평리에 은거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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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상평리에 있는 조선 전기 강학당. 김기서 강학당은 1548년경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는 전불사(典佛寺) 불당지라고 전하는 김기서 강학당을 세운 김기서는 광산인(光山人)으로, 자(字)는 시견(時見), 호는 돈목재(敦睦齋)로 조광조의 제자이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조광조와 신진사림(新進士林)들이 대거 숙청당하자 상평리에 은거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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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에 속하는 유인도. 섬 이름은 섬에 대나무가 무성하여 ‘대섬[竹島]’이라는 말과 섬이 크게 보인다고 해서 ‘대섬[大島]’이라고 불렀다는 말이 있다. 한자로 지명을 표기하면서 죽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두 섬 안 쪽에 있다고 해서 내죽도라고 한다. 고려 후기에서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흥덕현에 속하였다가 1914년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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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상평리에 있는 김연, 김석원, 김기서, 김경희, 심진을 기리는 조선 후기 사당. 노산사는 1826년(순조 26)에 고려 후기 명신인 김연(金璉)을 주벽으로, 김석원(金錫元), 김기서(金麒瑞), 김경희(金景熹), 심진(沈搢) 등 5명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주벽인 김연은 광산김씨 양간공파(良簡公派) 파조로, 1215년(고종 2)에 개경 동부에서 태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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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상평리에 있는 김연, 김석원, 김기서, 김경희, 심진을 기리는 조선 후기 사당. 노산사는 1826년(순조 26)에 고려 후기 명신인 김연(金璉)을 주벽으로, 김석원(金錫元), 김기서(金麒瑞), 김경희(金景熹), 심진(沈搢) 등 5명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주벽인 김연은 광산김씨 양간공파(良簡公派) 파조로, 1215년(고종 2)에 개경 동부에서 태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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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에 속하는 법정리. 보도산(普道山) 아래 마을이 있어서, 그 산의 이름을 따서 ‘도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1554년대에 광산김씨(光山金氏)가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 이후 콜레라가 유행하면서 폐촌되었다가 1730년 경 예조참판 정택신(鄭宅臣)이 정착하면서 새롭게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본래 고창군 오동면(五東面)의 지역으로, 19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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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에 속하는 법정리. 두암리는 풍수지리상 마을 모습이 곡물을 측정하는 ‘말[斗]’과 같다하여 ‘두암(斗岩)’이라 부른다고 한다. 1600년대 말 광산김씨(光山金氏)가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본래 무장군(茂長郡) 동음치면(冬音峙面)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송운리(松雲里)·신흥리(新興里)가 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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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심원면 만돌리에 있는 갯벌 체험장. 심원면 만돌리 곰소만[줄포만]에 있는 만돌갯벌체험학습장은 일반 갯벌과 달리 바다의 섬과 바위가 어우러져 자연 경관이 수려한 것이 특징이며 그중에서도 명사십리 백사장, 갯벌 위의 외죽도와 내죽도, 그리고 도수바위가 특히 유명하다. 곰소만[줄포만]의 생태를 활용하여 갯벌 생태, 염생 식물, 바지락 캐기, 고기잡이, 갯벌 스포츠 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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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매산리는 본래 묵도리라 하였다가 지형이 ‘매화낙지(梅花落地)’형국이라 ‘매산(梅山)’으로 고쳐불렀다고 한다. 1400년경 광산김씨(光山金氏) 매은(梅隱) 김오행(金五行)이 처음 들어와 묵도리라 했고, 1600년경 화순오씨(和順吳氏) 오언음(吳彦音)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본래 무장군(茂長郡) 대사면(大寺面)의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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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에 속하는 법정리. 무송리는 옛 무송현(茂松縣)의 터라서 ‘무송(茂松)’이라고 하였다 한다. 형성 시기는 뚜렷하지 않으나, 조선 중기 광산김씨(光山金氏), 진주강씨(晋州姜氏)가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본래 무장군(茂長郡) 원송면(元松面)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용두리(龍頭里)·금사리(金沙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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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에 속하는 법정리. 상평리는 1600년대 지금의 신평마을 뒤에 있던 등선마을에서 강릉유씨(江陵劉氏)가 자리 잡았다고 해서 ‘신평(新平)’으로 불렀다고 한다. 현재는 ‘상평(上坪)’이라 부르고 있다. 1600년대 말 강릉유씨(江陵劉氏)가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본래 고창군 고사면(古沙面)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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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일이 모두 끝난 늦가을부터 겨울이면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할머니들은 매일같이 마을회관에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우곤 한다. 그리하여 구수내가 동학농민혁명의 기포지 마을이기 때문에 관련 이야기 하나쯤은 들어 있을 법도 한데, 동학 이야기는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동학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 지 오래된 사건이라서 그랬을까? 참으로 듣기 어려운 이야기를 조르고 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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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 남편에 대한 정절을 지켜 포상을 받은 여자. 위난을 당하여 목숨으로 정조(貞操)를 지켰거나 또는 오랜 세월에 걸쳐 고난과 싸우며 수절(守節)한 부녀자들을 일반적으로 열녀라 부른다. 열녀는 고대에도 보이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 등에 나오는 신라 진평왕 때의 설씨녀(薛氏女) 이야기, 백제 개루왕 때의 도미(都彌) 처 이야기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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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하장리 오룡마을에 있는 광산김씨(光山金氏) 사당. 하장리 오룡마을 마을 뒤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 중앙 김인수(金璘洙) 가에 남향을 한 기와집 1칸이 있었는데, 건평 19.8㎥ 정도 되었다. 그러다 건물이 낡아 1998년에 새로 부지를 마련하여 사당을 다시 지었다. 오룡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풍판이 있고 기와를 얹었다. 앞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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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용계리는 용이 계곡에 살며 등천하였다 하여 용계(龍溪)라 하였다. 1600년대 진주강씨가 터를 잡고 살았고, 그 뒤 부평김씨와 연안이씨가 같은 시기에 들어왔다고 한다. 조선 말기에는 고창군 산내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인천(仁川)·원평(院坪)·신촌(新村)·오암(五岩)·용수(龍水)·용평(龍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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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에 속하는 법정리. 율계리는 마을을 가로지르는 시냇물과 밤나무가 많아 ‘밤계’·‘방계’ 또는 ‘율계(栗溪)’라고 하였다 한다. 조선 후기 동래정씨(東萊鄭氏)와 광산김씨(光山金氏)가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본래 고창군 산내면(山內面)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신반리(新半里)·발막리(鉢幕里)·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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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신일을 시조로 하고 서적·서욱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고창군 세거 성씨. 이천서씨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한다. 서신일은 모든 서씨의 도시조로 기자(箕子)의 40대손인 기준(箕準)의 후손이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 왕인 기준이 9세기 중엽 위만(衛滿)에게 쫓겨 지금의 이천 땅 서아성(徐阿城)에 정착한 것이 서씨의 시초라고 전한다. 이천서씨 고창군 입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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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부터 1598년까지 왜군의 조선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에서 1598년(선조 31)까지 2차에 걸쳐서 조선을 침략한 일본과의 전쟁이다. 제1차 침략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2차 침략이 정유년에 일어났으므로 정유재란이라 하는데, 이를 통칭하여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이때에 조국을 위기로부터 구하고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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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에 속하는 법정리. 자포리는 주변 지형이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자포실’ 또는 ‘자포(子包)’라고 하였다. 1750년경 광산김씨(光山金氏)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본래 흥덕군(興德郡) 이남면(二南面)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석암리(石岩里)·해암리(海岩里)·해월리(海月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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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에 속하는 법정리. 장산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장암리(壯岩里)와 기산리(旗山里)에서 ‘장(壯)’자와 ‘산(山)’의 이름을 따 ‘장산(壯山)’이 되었다. 마을의 형성에 대한 기록이 확실하지는 않으나, 1749년경 창원황씨(昌原黃氏)가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본래 무장군(茂長郡) 상리면(上里面)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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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 활동한 충신, 효자, 열녀에게 나라에서 정표하여 세운 집. 정려란 효자나 열녀, 충신 등의 행적을 높이 기르기 위해 그들이 살던 집 앞에 문(門)을 세우거나 마을 입구에 작은 정각(旌閣)을 세워 기념하는 것을 말한다. 이 정려는 ‘정문(旌門)’. ‘정표(旌表)’라고도 부른다. 건물이 아닌 문을 세우게 되면 정려문이고, 건물을 세우게 되면 정려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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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에 속하는 법정리. 죽림리는 ‘대’[나무]가 많이 있어 ‘대산’ 또는 ‘죽림(竹林)’이라고 하였다 한다. 옛날, 마을에 ‘대’와 ‘삼’이 유명하여 ‘대삼마을’이라고도 불렀다. 1450년 경에 광산김씨(光山金氏) 김남협(金南浹)이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본래 고창군 산내면(山內面)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송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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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중산리는 뒷산에 매화나무가 있어 ‘풍매’라고 불렸다. 어느 날 고승(高僧)이 주위 산세를 둘러보고는 풍경이 산중의 산이란 뜻으로 ‘중산(中山)’이라고 하여, ‘중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1570년경 영광김씨(靈光金氏) 김윤한(金潤漢)이 곡촌마을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1580년대에는 광산김씨(光山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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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 동성동본의 사람들로 형성된 촌락. 집성촌은 성(姓)과 본(本)이 같은 부계의 혈족들이 대대로 모여 사는 촌락을 의미한다. 마을을 주도하는 성씨가 상대적으로 결속하면서 토성과 세거성씨가 중심이 된 동족 마을이 발달하게 되었다. 1.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수록된 성씨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린 고창 지역의 세거성씨를 보면 고창현의 토성은 오(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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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에 속하는 법정리. 판정리는 ‘통시암’·‘통샘’·‘판정(板井)’이라 불렸다. 널빤지로 통을 짠 샘이 있었다는 의견과 마을이 우물에 띄어놓은 널빤지와 같은 지형이라 ‘판정’이라는 설도 있다. 형성 시기가 뚜렷하지 않으나, 조선 전기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안방죽골에 터를 잡았으나, 200년 후 역수(逆水)와 화재 등을 피해 현재의 축동마을 자리에 새터를 잡아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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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에 속하는 법정리. 하장리는 장사현(長沙縣)의 아래쪽에 있어 ‘하장(下長)’ 또는 ‘하장사(下長沙)’라고 하였다 한다. 고려가 망하자 1414년경 천안전씨(天安全氏) 전덕린(全德隣)이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본래 무장군(茂長郡) 하리면(下里面)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평정리(平亭里)·원두리(元斗里)·오룡리(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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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학전리는 풍수지리상 마을 뒷산이 학형국인데 그 학이 밭에 내려와 앉은 모양이라 학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1826년(순조 26) 청도김씨가 터를 잡고 살았고, 160여 년 전 옥천조씨 5형제가 뿌리를 내렸다. 조선 말기에는 무장면 탁곡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매사(梅査)·두월(斗月)·장화·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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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에 속하는 법정리. 학천리는 마을 지형이 학이 하늘로 나는 모양의 비학상천(飛鶴上天) 형국이라 ‘학천(鶴天)’이라고 불렀다 한다. 형성 시기는 뚜렷하지 않으나, 조선 전기에 광산김씨(光山金氏)가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본래 무장군(茂長郡) 성동면(星洞面)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조동리(釣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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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매산리에 있는 서원. 화동서원은 고창군에서 영광 방면으로 지방도 893호선을 따라 20㎞ 정도 가면 대산면이 나오는데, 마을 안쪽에 있다. 화동서원은 1958년 광산김씨(光山金氏) 종친에서 세운 서원으로, 본래 광산김씨의 사우를 그 출발점으로 한다. 1796년(정조 20) 시조인 신라왕자 흥광(興光)의 유허(遺墟)인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현 광주광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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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매산리에 있는 서원. 화동서원은 고창군에서 영광 방면으로 지방도 893호선을 따라 20㎞ 정도 가면 대산면이 나오는데, 마을 안쪽에 있다. 화동서원은 1958년 광산김씨(光山金氏) 종친에서 세운 서원으로, 본래 광산김씨의 사우를 그 출발점으로 한다. 1796년(정조 20) 시조인 신라왕자 흥광(興光)의 유허(遺墟)인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현 광주광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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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에 속하는 법정리. 화산리 앞에 꽃봉재가 있다. 꽃봉재 ‘화’자를 따서 ‘화산’이라 불렀는데, 처음에는 ‘화(花)’로 부르다가 ‘화(化)’가 좋다고 하여 ‘화산(化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전에는 ‘놋점[놋새·鍮店]’이라 하였다고 한다. 조선 중기 이전에 놋점[놋새]으로 유명했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폐촌된 이후 밀양박씨(密陽朴氏)가 터를 잡아 살기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