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14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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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麗水洞平壤趙氏墓域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여수동 산30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문수진 |
[정의]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여수동에 있는 평양조씨 묘역.
[개설]
여수동 평양조씨 묘역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인물 조견(趙狷)[1351~1425]의 묘를 쓰면서 조성되었다. 조견의 호는 송산(松山), 시호는 평간(平簡)으로 조선의 개국공신 조준(趙浚)의 동생이다. 조선왕조가 성립할 때에 그의 형 조준은 전제개혁 등 적극적으로 이성계 일파에 협력하여 개국공신이 되었으나 고려 말에 고위 관직에 있었던 조견은 조선의 관직을 거절하였고, 원래의 이름이 윤(胤)이었으나 견(狷)으로 고쳤다고 알려졌다.
조견이 청계산에 살 때 조선 태종이 청계산에 찾아와 같이 정치할 것을 권했으나 굽히지 않고 양주의 송산에 숨어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죽자 사람들이 조견의 상여를 메고 가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불어온 회오리바람에 명정이 날아가는 것을 보고,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따라가 보니 지금의 여수동 뒷골 조견의 묘가 있는 곳에서 떨어져 있자 후손들이 이상히 여겨 그 곳에다 묘를 썼다고 한다. 그는 임종할 때 “내 묘표에는 고려의 벼슬 이름만 쓸 것이지 새 조정의 벼슬 이름은 쓰지 마라”고 하였다. 그래도 형인 조준이 조선의 개국공신, 호조판서라고 비석을 세웠더니 어느 날 뇌성벽력이 치며 비석을 깨뜨렸다고 한다.
[위치]
여수동 평양조씨 묘역은 도촌사거리와 중원교[중원구청사거리] 구간 돌마로의 우측에 위치하여 있다. 조견 묘는 해발 90m 가량의 나지막한 구릉에 정서향하여 있고, 하단에는 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의 묘가 안치되어 있다. 조견 묘의 좌측 구릉에는 그의 아들 통정대부 조철산의 묘가 남향하여 있다.
[형태]
조견 묘는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유행대로 3단의 계체석(階砌石) 구조를 갖추었으며 방형의 봉분 형태이다. 봉분 주위로 좌·우·후 3면에는 90㎝의 간격을 두고 60~110㎝ 높이의 축대를 쌓아 활개를 대신하고 있으며, 상석, 문인석, 장명등의 옛 석물이 있다.
조철산 묘는 용미와 활개를 갖춘 원형의 쌍분이며, 좌측(동쪽)이 철산의 묘이고, 우측(서쪽)은 정경부인 이씨의 묘이다. 문인석, 장명등, 상석 등 묘역에는 다수의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금석문]
조견의 옛 묘표는 비신이 절단되어 1980년 10월 봉분의 오른쪽에 묘표와 묘갈을 각각 세우고 묘역 입구에는 귀부이수(龜趺螭首) 양식의 화려한 신도비를 건립하였다. 묘표의 비신 앞면에는 묘주를 밝히고 있으며, 신도비에는 4면 상단에 전서(篆書)로 ‘松山先生高麗按廉使趙平簡公神道碑(송산선생고려안렴사조평간공신도비)'라 하였고, 비제는 ‘十八代祖考松山先生高麗嶺南按廉使平簡公府郡神道碑(십팔대조고송산선생고려영남안염사평간공부군신도비)'이다.
조철산의 묘표는 일석(一石)의 비좌와 비신 및 화관석을 갖추고 있다. 비신은 앞면에 돌이끼가 있고, 비문은 양뒤 양면에 있으나 오랜 세월 마모로 인해 판독 가능한 글자는 몇 자 안된다.
[현황]
여수동 평양조씨 묘역은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여수동 산30에 위치하고 있으며, 평양조씨 종중회에서 관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