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1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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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月巖里 |
영어공식명칭 | Woram-ri |
영어음역 | Woram-ri |
영어공식명칭 | Woram-ri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외서면 월암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상석 |
[정의]
전라남도 순천시 외서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월암리 명칭은 월평마을과 구암마을에서 유래했다. 구암마을은 주변 형국을 ‘자랏등’이라 하여 ‘구암(龜巖)’으로 표기했다. 조선시대 낙안성 축조를 위한 채석 도중 성이 완성되어 남은 바위를 ‘남바구’라 했는데 이들을 묶어 ‘구암’으로 칭하였다가, 일제강점기 이후 ‘구암(九岩)’으로 썼다. 월평마을은 뒷산이 풍수상 반월형(半月形) 형국이라는 점이 명칭의 유래가 되었다.
하고마을은 뒷산이 곳간(庫間) 같은 곳에 자리하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윗마을은 ‘상고(上庫)’, 아랫마을은 ‘하고(下庫)’라 불렸는데, 1912년 일제가 각각 ‘상고(上古)’와 ‘하고(下古)’로 고친 후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말 이름이 ‘송뱅이’였던 송곡마을은 이곳에 있던 송방사(松方寺)의 이름을 본뜬 것이다.
[형성 및 변천]
월암리의 월평마을은 구석기시대 이후 사람이 줄곧 살아왔는데, 기록상으로는 1630년경 보성선씨가 입촌한 이후 여러 성씨가 어울려 살고 있다. 하고마을은 1650년경 김녕(金寧)과 김득형(金得亨)이 최초 정착했고, 구암마을은 광해군 12년 시학교관((詩學敎官) 한욱(韓頊)이 이괄의 난에 연루되자 그 부인이 아들과 함께 들어와 정착했다고 한다. 송곡마을은 이씨와 오씨가 함께 사는 마을에 함양(咸陽) 박익문(朴益文)이 임진왜란을 피해 마을에 정착하고 이후 이씨와 오씨가 거처를 이전했다고 한다.
월암리는 본래 낙안군 외서면에 속하는 지역이었는데, 1908년 낙안군이 폐지되면서 순천군에 속했다. 월암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월평리·하고리·구암리·송곡리·기동리 일부를 합쳐 개설했다.
1949년 8월 전라남도 순천시와 전라남도 승주군이 분리되면서 승주군 외서면 월암리가 되었다. 1995년 도농통합 정책에 의해 순천시와 승주군이 통합되면서 순천시 외서면 월암리가 되었다.
[자연환경]
월암리를 지나는 하천으로는 돌무렁천과 송곡천을 비롯하여 송광천이 있고, 하고마을-월평마을-구암마을을 잇는 삼각형 구역 내 하천 양안에 논이 분포한다.
[현황]
월암리 면적은 6.10㎢이며, 2019년 8월 31일 기준으로 인구는 122가구, 194명[남 95명, 여 99명]이다. 월암리는 외서면 전체에서 가구 및 인구가 가장 많은 법정리이다.
전라남도 순천시 외서면 월암리 주민들은 논농사와 딸기를 비롯한 농업 위주의 생활을 하며 월암리 월평마을에는 구석기시대 유적인 순천 월평 유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