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3201 |
---|---|
한자 | 曹敬瓚 |
이칭/별칭 | 중선(仲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윤종준 |
출생지 | 조경찬 출생지 - 서울특별시 |
---|---|
거주|이주지 | 조경찬 거주지 - 전라남도 영암군 |
묘소|단소 | 조경찬 묘소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도촌동 산33 |
성격 | 선비 |
성별 | 남 |
본관 | 창녕 |
대표 관직 | 향임 |
[정의]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도촌동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인물.
[개설]
조경찬(曹敬瓚)은 조선 후기에 혼란한 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전라남도 영암 월출산 아래에 안용당(安用堂)을 짓고 유유자적하며 살았던 은일지사(隱逸志士)이다.
[가계]
본관은 창녕(昌寧). 증조할아버지는 조세준(曹世俊)이고 할아버지는 의금부도사를 지낸 조기서(曹麒瑞)이며, 아버지는 조행립(曹行立)이다. 부인은 숙부인(淑夫人) 의령 남씨(宜寧南氏), 숙부인 죽산 안씨(竹山安氏)이다.
[활동 사항]
조경찬의 행적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정여립(鄭汝立) 옥사에 연루된 강해(姜海), 양천경(梁千頃) 일파의 탄핵으로 전라남도 영암 월출산 아래로 낙향하여 36세에 죽은 할아버지 조기서와 함께 낙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훗날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은 김수항(金壽恒)[1629~1689]의 『문곡집(文谷集)』 제26권에 수록된 ‘안용당기(安用堂記)’를 통해 조경찬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김수항은 6조의 판서를 모두 지내고 좌의정과 영의정 등을 역임한 저명한 문신이었다. 1674년 전라남도 영암으로 유배되어 1678년(숙종 4) 철원으로 유배지가 옮겨지기까지 4년 동안 조경찬의 보살핌을 받았다.
조경찬은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때 아버지와 함께 전라도 영암의 구림촌(鳩林村)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집 옆에 안용당을 지었는데, ‘안용당’이라는 당호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송나라의 학자인 안락옹(安樂翁)의 시구 “이미 한가해졌으니 어찌 이름을 다시 고치랴[旣閒安用更名爲]”를 취하여 지은 것이다. 세상의 부귀명예만 좇다가 몸을 망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유유자적하는 삶 가운데 손님이 찾아오면 비록 친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고기를 썰어 술안주를 삼아 술독이 다 비워지지 않으면 그만 두지 않았으며, 사냥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으며, 벼슬을 하기 위한 공부를 하지는 않았지만 인재를 선발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김수항이 지은 8수의 시 가운데 “안용당 노인[安用堂中老] 평생 의리가 하늘에 닿으셨더니[平生義薄雲] 우뚝 하던 호해의 기상[居然湖海氣] 도리어 광릉 무덤에 묻히셨구려[埋却廣陵墳].”라고 읊은 시가 있다. 광릉은 경기도 광주를 말한다. 조경찬이 왜 죽은 할아버지 조기서의 묘 아래에, 주로 생활하던 전라남도 영암과는 거리가 먼 경기도 광주[현 중원구 도촌동]에 묻히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조경찬의 묘 상석(床石) 앞면에는 ‘통덕랑(通德郞)’이라 새겨져 있지만 영암에서는 향임(鄕任) 정도를 지낸 것으로 보인다.
[묘소]
조경찬의 묘는 성남시 중원구 도촌동 산33번지에 있는 할아버지 조기서의 묘 아래에 있다. 상석 앞면에 “통덕랑부군(通德郞府君) 창녕 조공(昌寧曺公) 안용당 휘 경찬지묘(安用堂諱敬瓚之墓) 배 숙부인 의령 남씨 부좌(配淑夫人宜寧南氏附左) 배 숙부인 죽산 안씨 부우(配淑夫人竹山安氏附右) 갑좌(甲坐) 경신 이월 일(庚申二月日)”이라고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