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16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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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兵運動 |
분야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집필자 | 서승갑 |
[정의]
국가가 외침을 받아 위급할 때 국민 스스로 일어나 자위군을 조직하여 이에 대항하는 일. 여기서는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일어난 의병의 활동을 말한다.
[배경]
정신적인 측면에서 보면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시대까지 성남지역을 포괄한 광주지역은 실학의 진원지로 근기학파(近畿學派)의 개조인 성호 이익(李瀷)을 위시하여 안정복(安鼎福), 정약용(丁若鏞) 등이 학문적 토대를 마련한 곳이다. 광주지역에는 성호계열의 남인학자들이 많이 살았고 서학과 깊은 관련을 갖는 주위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런 관계로 남인계열 학자들이 봉건사회에 대한 비판정신을 함양하는 한편, 서양의 합리주의와 평등사상을 수용할 수 있는 포교활동을 통하여 근대화를 추구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정신적 토대의 측면에서 보면 성남지역의 주체적인 민족정신은 직접무장투쟁의 근간이 되었다.
일제에 대응한 성남지역의 민중의 생존권 투쟁은 항일의식을 배양하고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등 민족역량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일제의 침략으로 상품화폐경제로 편입되면서 한층 강화되는 원시적 약탈경제와 국권침탈에 대해 직접적으로 대응하려는 움직임이 성남지역에서 활발하게 발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요인들이 계기가 되어 서울과 인접한 경기의 성남지역은 1차 의병전쟁의 최대 격전지로 부각되었고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줄기찬 투쟁이 이어졌다.
[전개]
(1) 전기 의병활동 : 성남지역의 전기 의병활동은 1895년에 일어난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대항하여 1896년 1월 김하락(金河洛)이 주도하여 일으킨 남한산성 의병진으로 모아진다. 남한산성 의병층은 주로 지방군인 포군이 주축이었기 때문에 일제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대등하게 전략을 구사할 수 있었다. 남한산성 의병진은 천혜의 요새지를 점령하고 풍부한 군수물자를 확보하자 서울진공작전을 추진하였다. 서울진공작전은 춘천, 분원, 공주, 청주, 수원 의병진과 연합하여 남한산성에 주둔한 관군과 일본군을 협공하여 격파한다는 것이었다. 3월 5일 첫 전투에서 남한산성 연합의병진은 친위대의 침공을 격퇴하여 송파지역으로 내몰았고 대포 1문을 탈취하였다. 이에 정부측은 강화도 지방병을 지원하는 한편, 남한산성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항복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3월 20일 이를 거부한 남한산성 연합의병진은 관군 및 일본군의 공격으로 인해 패퇴하고 말았다. 남한산성전투는 전기 의병사의 대표적인 격전으로 의병 500여명과 관군 300여명이 사망하는 치열한 전투양상을 보여주었다.
(2) 후기 의병활동 :성남지역 후기의병은 상품화폐경제의 폐단이 파급되자 자발적인 의병이 급증하고 군대해산을 계기로 전술전략이 강화되면서 치열하게 전개된 것이 특징이다. 성남지역의 의병활동은 을사조약 이전 단계인 1904년 5월 말에서 6월 초에 나타난다. 즉 의병 180여명이 광주부 동쪽 40리 도척면(都尺面)에서 부민 배참봉에게 군량전 2천냥을 징발하고 궁평동(宮坪洞)에서 조총 4정, 상림동(祥林洞)에서 양총 1정과 조총 3정을 탈취한 후 죽산으로 향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광주 의병장 구만서(具萬書)는 포군 50여명을 인솔하고 6월 7일 새벽 지평군 일진회 사무소를 포위한 후 일진회 지회장 이강수와 부회장 이재연 등 7명을 포살하였다. 이어 곡수(曲水)에서 일진회원 2명을 체포하여 의병에 가입시켰다. 전체적인 면에서 보면 이 시기의 의병활동은 의병조직을 강화하는 한편, 일제에 협력하는 일진회원에 응징을 가하는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1907년 군대해산 이후 군인층이 의병전쟁에 참가하면서 전술전략에 변화를 초래하였다. 화력의 증가는 물론 전투훈련도 강화되어 부대 규모가 축소되었다. 또한 전투방법도 거점 확보전에서 유격전술을 구사하면서 전투력이 향상되었다. 직접 무장투쟁을 결심한 남상목은 1907년 7월 용인 용천곡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구식총 등으로 무장하였다. 8월부터 시위대 좌익군장이던 김재선(金在善) 등 부하 50명과 함께 광주, 수원 등지에서 활동하다 김군필 부대와 합진하였다. 이강년 의병대에 합류한 남상목은 참모관을 역임하면서 음성전투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광주군 대왕면 출신인 윤치장(尹致章)은 퇴역병 출신으로 농업에 종사하다 의병에 참여하여 1907년 11월 중군장 오사과(吳司果) 등 부하 70명과 함께 광주, 과천에서 활동하였다. 11월 20일경 광주군 청계산 부근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였고, 1908년 1월에는 광주군 목동에서 일본 기병대와 교전중 부하 8명을 잃기도 하였다.
1910년대를 전후하여 성남지역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의병활동은 일정 부분 잠재된 것으로 나타난다. 일제는 1910년 2월에 의병장 강기동을 체포하기 위해 변장 순사대를 조직하여 무기한으로 광주, 포천, 양주 등지에 파견했다는 사실이다. 변장 순사대를 조직하여 집중적으로 감시했다는 사실은 광주지역에서 의병활동이 빈번하게 발생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전후 사정을 감안하면 광주지역에서 의병활동은 강기동의 의병진과 변장 순사대의 전투가 펼쳐지면서 지속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강기동의 의진은 주로 양주, 포천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결국 성남지역의 의병활동은 타지역과 연관된 의병진의 위수지역으로 편입되면서 일제강점 속에서도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했다는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의의]
성남지역의 의병운동은 반외세, 반봉건을 요구하는 직접 무장투쟁이었다. 성남지역 의병전쟁의 특성이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해결하려는 민족운동이었으나 계몽운동과 연계되지 못하고 분산적인 형태로 전개된 것에서 한계성을 찾을 수 있다.
성남지역에서의 근대화운동은 서울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관계로 다른 지역보다 정국적인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성남지역은 서울의 주변부인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중심부의 운동을 포괄하는 한편 운동의 역량을 분산시켜 강화하는 기능도 수행하였다. 이런 특성으로 성남지역의 근대화운동은 자강운동과 항일의병전쟁으로 진행된 전국적 추이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