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15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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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元景夏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연복 |
[정의]
조선 후기 성남 지역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화백(華伯), 호는 창하(蒼霞) 또는 포와(胞窩)이다. 효종의 부마 흥평위(興平尉) 원몽린(元夢鱗)의 손자이고, 목사 원명구(元命龜)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형조좌랑 이세필(李世弼)의 딸이고, 부인은 신사철(申思喆)의 딸이다. 원인손(元仁孫)과 원의손(元義孫)이 그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원경하의 가문이 당시의 현족(顯族)이었으므로 음사(蔭仕)로 관직에 진출하였다가 1721년(경종 1)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736년(영조 12)에 세자익위사 부솔(世子翊衛司 副率)로서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739년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는 탕평책에 대하여 영조(英祖)에게 의견을 말하였다. 1743년에 예문관제학, 봉상시제조를 거쳐, 이듬해에는 이조참판를 지냈다. 1745년에 부제학으로 호남의 전정(田政) 문란을 상소하였고 호남 사정에 밝다 하여 호남진전개량사(湖南陳田改量使)에 임명되었다. 60세에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로 벼슬에서 물러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학문과 사상]
원경하는 문장에 능하였고 생활이 검소하였다. 임정(任挺), 정우량(鄭羽良), 오광운(吳光運), 윤유(尹游) 등과 조정에서 노론·소론만의 탕평인 소탕평에 반대하고 모든 붕당을 망라하는 대탕평을 주장하였는데, 영조가 그를 매우 신임하여 그의 주장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저술 및 작품]
전체 10권으로 된 『창하집(蒼霞集)』이 전하는데, 이 문집의 기록을 통해 인조반정공신(仁祖反正功臣)의 한 사람인 원두표(元斗杓)의 가문에 대한 이해와 당시의 정치적 사건 등에 관해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묘소]
원경하의 묘는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사송동 산16-1에 있다.
[상훈과 추모]
원경하가 죽자 왕이 직접 제문을 지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