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7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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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牧丹開拓團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장원봉,김정진 |
[정의]
경기도 성남 모란 지역에서 1970년 말 개발 및 분양 사업을 시행하기 위하여 설립된 조직.
[개설]
모란개척단을 만들고 운영한 사람은 예비역 대령이었던 김창숙(金昌叔)이다. 재향군인개척단을 조직했던 김창숙은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경기도의 광주군수로 특채되어 1961년 3개월 동안 재임하였고, 군수직을 그만둔 뒤 당시 광주군 돌마면 하대원리의 재향군인개척단으로 돌아와 숙식을 같이하였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신개척지에 마을이 형성되자 지명(地名)이 필요하였던 김창숙과 대원들은 북한에 두고 온 어머님을 그리는 뜻에서 ‘모란’이라 이름 붙였고, 재향군인개척단의 명칭도 모란개척단으로 변경하였다.
[변천]
1961년 예비역 대령 김창숙이 재향군인 50여 명으로 조직한 모란개척단은 단대천 제방 쌓기와 모란장 개설, 모란중학원과 모란우체국 설립 등 ‘자발적 잘 살아보기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 뒤 자녀들의 교육 문제가 대두되고 대원들의 생활필수품 조달 문제, 통신 문제 등 생활 여건 조성이 문제가 되자 김창숙은 관계기관의 허가를 받아 오늘날 전국 최대 규모의 민속시장으로 성장한 모란시장을 5일장으로 개설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성남우체국의 전신인 모란우체국을 별정우체국으로 개설하였는데, 초대 우체국장에는 당시 체신부 장관 장승태(張承台)의 아우인 장승길(張承吉)이 부임하였다. 모란개척단의 개간사업은 삽과 곡괭이로 수십 평 또는 수백 평의 자갈밭을 일구어 나가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소박한 개척자들에게 광주대단지 개발은 실의와 허망을 한꺼번에 안겨 주었다. 하지만 1970년 겨울 서울특별시가 개발하던 광주대단지엔 부동산 붐이 지나가고 서울시 측에서 전매행위 금지조치를 내리면서 살벌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을 때라 서울시 관할이 아닌 모란단지에 전매 입주자가 모여들어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창숙은 1970년 12월 모란개척단을 공식적으로 설립하고, 1971년 2월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4가 일흥빌딩에 주식회사 모란개척단 사무실을 내고 본격적인 개발 및 분양 사업을 추진하였다. 2월 10일에는 모란 현지에서 기공식을 거행하였는데 행정기관의 기관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에서 국회의원, 예비역 장성 등을 태운 헬리콥터가 모란 개척지까지 오고 수십 대의 불도저가 땅을 밀어내며 성대한 기공식을 가졌다. 이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이웃 주민이나 모란 지역의 지주들이 모란개척단의 실체를 믿지 않을 수 없었고 모란 개발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당시 모란개척단의 고문진에는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예비역 장성, 대학교수, 일본인 전문가 등 저명한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모란 단지 사건이 종료된 후에 밝혀진 바로는 김창숙이 당사자의 허락 없이 추대한 것이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정부의 지원이 없었던 모란개척단은 김창숙 대령이 미군부대의 중장비를 빌려 와서 단대천의 범람을 막기 위한 제방을 쌓기 시작하였다. 단대천은 장마철마다 익사사고가 발생했는데 1990년대 초에 복개되고 지하철 8호선이 통과하였다. 모란개척단의 활동은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라고 하는 청도 주민들의 1971년 수해복구 사업보다 10년이 앞선 것이었다.
모란 지역 개척 사업이 시작되면서 모란시장이 생겼고, 천호동에서 오포까지 운행되는 버스정류장이 생기고 모란우체국이 설립되었다. 모란우체국은 장승길이 설립한 별정우체국이었다. 장승길의 형이 체신부[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장승태였다. 1972년에 성남우체국이 생기기 전까지 지역 주민들에게 기쁜 소식과 슬픈 소식을 전하던 유일한 통신시설이었다. 모란개척단은 스스로 흙벽돌을 찍어 교실을 짓고 모란중학원을 설립했는데 지금의 풍생중학교와 풍생고등학교이다.
모란개척단에서는 새로운 농사도 시도하였다. 『동아일보』 1962년 2월 9일 기사에는 자갈밭 25만 평을 개발하고 있는 ‘모란지구 농장개척단’에 하와이 교포들이 보낸 의류들이 트럭 2대에 실려서 모란학원 학생 200여 명과 주민들에게 전달되었다고 보도하였다. 그리고 미국 제8군의 도움으로 1961년에 커피를 시험 재배하여 반 가마의 커피 씨를 수확해 앞으로 국산 커피 ‘건설차’를 대대적으로 재배할 예정이라고 하였다. 커피나무가 한국 기후에 적응하기 어려운데 어쨌거나 개척단 청년들이 잘 살아 보려고 애쓰고 노력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기록이다. 그러나 커피 재배의 실상은 결명자 재배였다.
[현황]
성남문화원은 모란개척단에 대한 계속적인 자료 조사를 해 오면서 2009년 5월 25일 모란 니즈웨딩홀에서 ‘성남 모란의 과거와 미래’라는 제목의 학술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는 1970년 말 모란 지역의 개발과 분양 사업을 시행하기 위해 김창숙 단장을 중심으로 설립된 모란개척단의 모란 지역 개간사업 전개 과정과 전국적 규모로 성장한 모란시장의 사회사적 의의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며, 김창숙의 아들 김시천 예비역 육군 소장이 직접 참석해 ‘모란개척단, 그들의 노고’를 주제로 유년 시절의 기억과 유족으로서 들었던 당시의 소회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또한 성남문화원에서는 성남문화해설사 양성 교육과정 중 한춘섭 성남문화원장이 모란개척단과 관련한 내용으로 특강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성남시 수정도서관에서는 2020년 특화도서관 육성 지원 사업으로 윤종준 성남문화원 성남학연구소 상임위원을 초빙해 ‘성남의 역사와 모란개척단’ 특강 등을 진행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