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5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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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世健 |
이칭/별칭 | 백순(伯順)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장필기 |
[정의]
1484년(성종 15)~1552년(명종 7).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백순(伯順). 할아버지는 내섬시부정 남이(南儞)이고, 아버지는 군수 남변(南忭)이며, 어머니는 좌참찬 이훈(李塤)의 딸이다. 이조판서 남이공(南以恭)의 증조부이다.
[활동사항]
문음(門蔭, 공신이나 고관의 자제를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채용하던 일)으로 참봉이 되어 1524년(중종 1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29년 사서, 지평, 부수찬, 부교리, 시독관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 장령, 교리가 되었다. 1531년 응교, 전한을 역임하고 이듬해 시강관이 되어 기강을 바로잡을 것을 주장하였다. 1533년 직제학이 되고 이듬해 대사간, 동부승지, 우부승지를 거쳐서 1535년에 우승지가 되었다.
1536년(중종 31)에 예조참판, 병조참판에 이어 충청도관찰사로 나갔으며, 이듬해 형조참판, 호조참판, 대사헌을 역임하고 1541년 전주부윤, 1542년 한성부좌윤이 되었다. 1544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인종이 즉위하자 가선대부로서 호조참판이 되고 『중종실록』과 『인종실록』의 편찬에 편수관으로 참여하였다.
명종 원년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사은 겸 주문진하사(謝恩兼奏聞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그가 쓴 표문의 잘못된 표현으로 벌을 받기도 하였다.
1546년 형조참판에 이어 이듬해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가 되었다. 1548년(명종 3) 경기도관찰사로 나가 흉년으로 인해 곤핍해진 민생을 돕고 백성들의 기근을 구제하는 데 온 힘을 다하였다. 또한 충효한 사람 및 절개를 지킨 부녀자들을 포상할 것을 왕에게 상소하였다.
1549년 공조참판이 되고 이듬해 대사성, 호조참판이 되었다. 1551년 특진관이 되어 저화(楮貨)를 사용하자는 당시의 의논에 대하여 백성들이 기뻐하지 않으며 이전에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반대하였다. 김안로(金安老) 파로 분류되어 사림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