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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석씨원류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0008
한자 禪雲寺-釋氏源流
영어의미역 Seokssiwollyu in Seonunsa Temple Shows Important Aspects of Late Joseon Dynasty's Buddhist Cultures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500[선운사로 250]지도보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연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71년 12월 2일연표보기 - 선운사석씨원류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4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선운사석씨원류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재지정
성격 목판
문화재 지정번호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개설]

『석씨원류(釋氏源流)』는 1425년에 중국 명나라의 승려 보성(寶成)이 인도와 중국에서의 불교의 전개 과정을 400여 편의 일화로 구성한 불교 역사서이다. 기존의 불교 역사서가 특정 종파의 입장이나 지식인인 승려의 입장에서 불교사를 정리하였던 것과는 달리 이 책은 특정 종파에 국한되지 않고 통합적 입장에서 일반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화를 중심으로 불교사의 흐름을 정리하였다. 또한 각각의 일화에는 그 내용의 이해를 돕는 삽화를 첨부하였는데, 이는 글을 읽지 못하는 일반 대중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일반인의 이해를 돕는 삽화가 첨가된 재미있는 『석씨원류』는 불교가 위축되고 중국과의 불교 교류를 엄하게 금지하였던 조선 시대에도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유통되었다. 17세기에는 형태가 다른 두 가지의 『석씨원류』가 목판본으로 간행되어 민간에 널리 유통되었고, 이 책의 삽화는 조선 후기 사찰 벽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선운사에 보관되어 있는 『석씨원류』의 목판은 1648년 이 절에서 판각한 것이다. 중국과의 민간 차원의 교류 과정에서 유통된 책을 저본으로 하여 판각한 것으로, 조선 후기 불교의 대중화와 불교문화의 발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선운사석씨원류(釋氏源流) 목판은 1971년 12월 2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재미있는 일화와 그림으로 구성된 불교 역사책]

『석씨원류』는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옛 문헌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글과 그림이 반반씩 구성되어 있다. 하나의 일화를 글과 그림으로 각기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시대에 간행된 『석씨원류』는 2종이 있다. 1648년(인조 26)에 간행된 고창 선운사본(禪雲寺本)은 한 면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에 각기 그림과 글을 배치하였다. 1673년(현종 14)에 간행된 양주(楊州) 불암사본(佛巖寺本)은 한 장의 앞면과 뒷면에 각기 그림과 글을 배치하고 있다.

그림을 함께 수록한 것은 해당 일화의 내용을 시각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많은 사람의 흥미를 유발하는 한편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 책이 지식인이나 전문 승려가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은 수록된 일화의 성격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일화는 대부분 부처님이나 고승의 행적 중에서 흥미로운 사건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분량도 한 편당 280자 내외로 길지 않게 하여 사람이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책은 모두 4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 권당 100편 정도의 일화로 구성되어 있다. 앞의 2권은 인도 불교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석가모니의 출생 이전의 인연으로부터 석가모니의 출생 이후의 다양한 행적과 주요 경전의 설법 인연, 석가모니 열반 이후 불교 교단의 동향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뒤의 2권은 중국 불교의 역사에 관한 내용으로, 중국에 불교가 수용되기 이전의 불교와 관련된 일화로부터 불교 수용 이후 원(元)나라에 이르기까지의 불교계의 주요 사건과 인물에 관한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각 편의 첫머리에는 해당 일화의 제목과 함께 본래 그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던 출전 문헌을 밝히고 있다. 인도 불교편은 여러 경전의 내용에 의거하고 있으며[총 61종], 중국 불교에 관한 내용은 여러 종류의 고승전(高僧傳)과 불교 백과전서 등을 출전으로 하고 있다[총 24종]. 한 편의 분량이 길지 않기 때문에 출전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지 않고 주요한 내용만을 간략히 요약하였는데, 주로 흥미로운 내용 위주로 정리하고 있다.

[중국 『석씨원류』의 성립과 유통]

『석씨원류』의 편찬자인 보성은 중국 사명(四明) 지방[현재 절강성(浙江省) 영파(寧波) 지역] 출신으로 소주(蘇州)에 있던 대보은사(大報恩寺)에서 생활하던 승려였다. 그의 자세한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석씨원류』의 성격으로 볼 때 대중에 대한 교화를 중시하는 승려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처음 『석씨원류』를 편찬하기 이전에 『석가여래응화록(釋迦如來應化錄)』이라는 책을 편찬하였는데, 이 책은 석가모니의 출생 인연과 생애 등을 208편의 일화로 구성한 것으로 『석씨원류』의 앞부분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 보성은 부처의 가르침은 중생을 이롭게 하는 행적에 나타나고 있으므로 석가모니의 교화의 자취를 드러내는 것이 부처의 가르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1425년에 『석가여래응화록』에 중국 불교에 관한 일화 200편을 추가하여 『석씨원류』를 완성하였다. 추가한 일화의 서문에서 중국에 불교가 들어온 이후 역대 고승들은 석가모니의 뜻을 이어받아 다양한 방법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였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완성된 『석씨원류』는 처음에는 408편의 일화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 불교의 역사에 관한 일화를 200편으로 줄여 전체를 400편으로 한 개정본이 출현하였다. 인도 일화의 숫자를 중국 일화의 숫자와 일치시킨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고 생각된 일화가 생략되었다. 『석가여래응화록』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던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중국으로 가르침을 전한 일화도 생략되었다. 이와 같이 본래의 408편을 400편으로 개정한 개정본이 출현하였지만 이후에도 408편의 체제를 갖는 책은 400편 체제의 책과 함께 계속하여 유통되었다.

처음에는 주로 민간에서 유통되었던 『석씨원류』는 1486년 황제의 발원에 의해 명나라 궁중에서 간행되게 되었다. 당시 황제인 헌종(憲宗)은 이 책의 유통을 독려하는 서문을 친히 지어 주었고, 책의 모습도 이전의 책보다 훨씬 고급스러운 형태를 띠게 되었다. 또한 당(唐)나라 때 시인 왕발(王勃)이 지은 『석가여래성도응화사적기(釋迦如來成道應化事蹟記)』도 부록으로 추가되었다.

[조선 후기 중국과 불교문화의 교류]

중국 명나라에서 편찬된 『석씨원류』는 조선 후기에 들어와 우리나라에서도 유통되기 시작하였다. 중국에 다녀 온 사신을 통하여 혹은 민간에서의 중국과의 교류 과정에서 『석씨원류』가 수용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 책에 대한 사람의 관심과 수요도 늘어나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드디어 1648년과 1673년에 선운사와 불암사에서 『석씨원류』의 목판을 만들어 널리 간행·유포하기에 이르렀다.

선운사본에 수록되어 있는 하호연(河浩然)의 서문과 선운사 승려 현익(玄益)의 발문에 의하면,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사명대사(四溟大師) 송운(松雲)이 처음 『석씨원류』를 유포시켰는데 점차 책을 구하기 힘들게 되자 모악산(母嶽山)의 승려 해운(海運)과 거사(居士) 최서용(崔瑞龍)이 선운사 승려의 도움을 받아 목판을 판각하여 간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불암사본에 수록되어 있는 이해(李瀣)의 서문과 승려 처능(處能)의 발문에 의하면, 1631년(인조 9)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정두원(鄭鬥源)이 대겸(大謙)이라는 중국 승려로부터 『석씨원류』 한 질을 선물로 받아 가져와 금강산에 있던 춘파대사(春坡大師)에게 주었고, 후에 춘파대사의 부탁을 받은 금강산 유점사(楡岾寺) 승려 지십(知什)이 불암사에서 목판을 판각하여 간행하였다고 한다.

선운사와 불암사에서 목판을 만들어 간행한 이후 『석씨원류』는 승려뿐만 아니라 일반인 사이에서도 널리 읽히게 되었다. 선운사와 불암사의 목판을 이용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간행한 사례가 확인되고 있다. 지역적인 원인으로 선운사본은 주로 남부 지방에서 유통되었고, 불암사본은 주로 중부와 북부 지방에서 유통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조선 시대는 숭유억불정책으로 국내의 불교문화가 크게 위축되었을 뿐 아니라 중국과의 불교문화 교류도 거의 단절되었다. 특히 조선 초기에 일부 승려가 불교 신앙심이 두터운 명나라 황제에게 조선의 억불정책을 중지시켜 달라고 탄원하려다 적발된 사건이 발생한 이후 중국과의 불교 교류는 엄하게 금지되었다. 따라서 고대나 고려 시대와 달리 조선 시대에는 중국과의 불교문화 교류 모습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17세기에 『석씨원류』가 두 곳의 사찰에서 간행되고 널리 읽인 것은 특별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석씨원류』의 대중적 성격 때문에 많은 사람이 흥미를 갖고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국가에서도 그 유통을 제한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선운사본 『석씨원류』의 저본과 출판 문화]

명나라에서 구해온 책을 저본으로 하였다고 하는 불암사본은 실제로 1486년 명나라 황실에서 간행한 책을 저본으로 하고 있다. 그림과 글씨의 형태와 크기 등이 명나라 황실에서 간행한 책과 거의 동일하다. 한편 선운사본의 경우 서문과 발문에서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구해온 책을 저본으로 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일본에서 간행된 책을 저본으로 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국의 사찰에서 간행한 책을 저본으로 한 것이다. 선운사본의 첫 번째 항목에는 대흥륭사(大興隆寺)에서 간행하였다는 내용이 쓰여 있는데, 이 대흥륭사는 일본의 사찰이 아닌 중국 북경(北京)에 있던 사찰이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석씨원류』를 간행한 사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재 일본에 전해지고 있는 『석씨원류』도 일본 국내에서 간행된 것이 아니라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간행한 것을 수입한 것이다.

명나라 황실 간행본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는 불암사본의 경우 각 장(丈)의 좌우에 본문과 삽화를 배치하여 1장에 하나의 일화만 수록되어 있다. 이와는 달리 민간에서 유통되던 책을 저본으로 하고 있는 선운사본은 각 장의 좌우 면에 각기 하나의 일화를 수록하고, 각각의 일화는 윗부분의 삽화와 아랫부분의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에 따라 불암사본의 목판은 한 면에 하나의 일화씩 1매(枚)의 목판에 앞면과 뒷면을 합하여 2개의 일화가 새겨져 있고, 선운사본의 목판 1매에는 앞면과 뒷면에 각기 2개씩 총 4개의 일화가 새겨져 있다. 전체 목판의 개수는 불암사본이 212매, 선운사본이 110매이다.

중국 민간에서 유통되었던 책을 저본으로 하여 지방의 승려와 재가 신자가 중심이 되어 간행한 선운사『석씨원류』 목판은 조선 후기 민간에서의 출판 문화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자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삽화가 수록된 책의 간행은 민간의 인쇄문화 발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을 것이다. 선운사본 목판은 현재 52매만이 선운사에 보관되어 있고, 나머지 목판들 중 일부는 전주국립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 다른 일부는 유실되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조선 후기 사찰 벽화와 『석씨원류』의 영향]

『석씨원류』는 흥미로운 일화 및 그 내용을 설명하는 삽화로 구성된 불교 역사서로서 근세 중국과 한국에서 불교의 사상과 역사를 일반인에게 널리 퍼뜨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이 책에 수록되어 있는 삽화는 이후 사찰 벽화 중의 석가여래의 생애를 그린 팔상도(八相圖)의 모본(模本)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조선 전기의 팔상도가 석가의 주요한 여덟 가지 행적만을 그렸던 것과 달리 조선 후기의 팔상도는 8상 각각에 관련되는 또 다른 그림이 추가되어 4~9 장면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형태로 변화하였다. 이때 추가된 그림은 대부분 『석씨원류』의 삽화를 모본으로 하였다.

또한 각각의 그림에는 각 장면의 이해를 돕는 설명이 추가되었는데, 그 내용 역시 대부분 『석씨원류』의 본문에 의거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후기의 팔상도는 석가의 주요한 여덟 가지 행적에 대한 그림이 아니라 석가여래의 행적을 다양하게 묘사하는 불전도(佛傳圖)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1709년에 제작된 경상북도 예천 용문사(龍門寺)의 팔상도를 시작으로 하여, 18세기에 그려진 전라남도 구례의 천은사(泉隱寺)[1715년], 경상남도 고성의 운흥사(雲興寺)[1719년], 전라남도 순천의 송광사(松廣寺)[1725년], 경상남도 하동의 쌍계사(雙溪寺)[1728년] 등의 팔상도에는 『석씨원류』의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들 사찰이 자리한 지역을 고려할 때 남부 지방에서 널리 유통된 선운사본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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