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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할머니의 동학란 이야기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C030101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한미옥

[마을회관만큼 모이기 좋은 곳도 없어]

농사일이 모두 끝난 늦가을부터 겨울이면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할머니들은 매일같이 마을회관에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우곤 한다. 그리하여 구수내가 동학농민혁명의 기포지 마을이기 때문에 관련 이야기 하나쯤은 들어 있을 법도 한데, 동학 이야기는 쉽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동학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 지 오래된 사건이라서 그랬을까? 참으로 듣기 어려운 이야기를 조르고 졸라 겨우 하양례[1934년생] 씨에게서 동학 관련 이야기 하나를 들을 수 있었다.

내용인즉, 하양례 씨가 새색시 때 시댁의 광에 쌀이 세 가마니나 들어가는 큰 항아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하양례 씨가 쌀을 푸려고 항아리를 만지는 순간 바닥으로 깊이 가라앉아 버리더란다. 너무 놀라서 시할머니에게 “할머니, 광이 어째 푹푹 꺼지요? [항아리가 바닥으로] 짚이[깊이] 들어가 버려요.”라고 하자, 그때서야 시할머니가 “굴 판 자리라, 그때 [흙으로 굴속을] 돋았어도 또 요러고 내려 앉는갑다.”고 하시면서 그 굴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한다.

시할머니[최씨]가 이곳 구수내로 시집을 와서 살고 있는 어느 해에 동학란이 터졌다고 한다. 당시 동학란에 시할머니의 친정 남동생이 가담했는데 관원들이 동생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더란다. 그래서 누나인 시할머니가 자신의 집 안에 있는 광 바닥에 굴을 파고 동생을 피신시키고 그 위에다 물레를 올려놓았단다. 그러고는 매일 밥 먹을 때마다 식구들 몰래 자신의 밥을 조금씩 남겨서 물레를 치우고 굴속으로 넣어 주었고, 그렇게 해서 동생은 무사히 동학란 때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에 굴을 흙으로 메웠는데도 세월이 흘러 손자며느리를 본 그때까지도 광 바닥이 그렇게 가라앉더라는 이야기다.

[젊었을 땐 고생해도 후복 터졌대]

좀처럼 듣기 힘든 동학 이야기를 들려주신 하양례 씨는 열여덟 살 때인 1952년 11월 27일 영광군 홍농읍 우봉리라는 마을에서 이곳 광산김씨 집안으로 시집을 왔다. 어느 정도 밥은 먹고 산다는 친정에서 시집을 오고 보니, 시부모에 시할머니까지 층층시하에 가난한 살림까지 어느 것 하나 마음에 차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시집 온 해에 당시 마흔한 살이었던 시어머니가 딸 하나를 더 낳고 보니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 혼사였다.

“내가 싯짼디, [친정어머니가] 일찍 여우믄[시집보내면] 딸이 고생헌다고, 막둥이 딸은 나이 쪼까 믹여서 여울란다고 했는디. 오라비댁이 그렇고 억~지로 해 갖고 여웠어. 오오라비댁이 혼차 되야 가지고, 권리가 오라비댁에 있어 가지고 그랬제. 오빠가 6ㆍ25 때 돌아가셔 부렀거든. 오빠만 기셨어도 그렇게 안 정했을 텐디.”

친정 오빠가 일찍 돌아가셔서 혼자 된 올케언니가 서둘러 자신을 시집보낸 것에 대해 하양례 씨는 아직도 서운하기만 하다. 그렇게 일찍 보내지만 않았어도 자신이 젊은 날 그리 고생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에 말이다.

그렇게 서운한 마음으로 시작한 시집살이였지만, 그래도 자식 낳고 살아온 지난 세월이었다. 사는 동안 남편의 무심함에 힘든 세월도 보냈으나 자식들 때문에 꾹 참고 살아왔다. 따지고 보면 남편이 자신에게 그렇게 무정하게 대했던 것도 기실 남편의 탓만도 아니었다.

자신보다 한 살 위였던 남편은 군대를 다녀온 후에 몸이 몹시 쇠약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못견뎌했던 시아버지는 매일 같이 남편을 구박했고, 그러면 남편은 다시 아내인 자신에게 그 화풀이를 하고는 했으니, 결국 자신의 불행은 시아버지에게서 온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니 말이다. 그래도 그런 것은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는 일이었다. 정말로 힘들었던 것은 중간에 자식 남매를 먼저 보내 버린 것이었다.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잠시 서울로 돈 벌러 간 사이에 홍역을 앓던 아이들이 죽은 것이다.

“내가 없었기 때문에 남매가 없어져 버리고. 시살 먹고, 다섯 살 묵고 헌 놈을 두고 식모살이해서, 돈 쪼까 벌어 갖고 또 왔제. 못 잊어서. 근데 새끼들은 둘 다 홍진[홍역]허다 가 버렸드라고. 둘이, 어린 것들이. 먹을 것 없은게, 뭣을 안 줘서 죽었어, 아가들이. 에미[어미]가 없은게.”

스무 살에 첫 아들을 낳은 뒤 중간에 자식을 먼저 보낸 아픔도 겪었지만, 그래도 지금의 6남매[5남 1녀]가 훌륭하게 자라 주었고, 또 세상에서 어머니가 제일 귀한 줄 아는 자식들 덕분에 더없이 좋은 날을 보내고 있는 하양례 씨. 이런 할머니에게 동네 사람들은 하나같이 “후복 터졌다.”면서 부러워한다고 한다.

[정보제공]

  • •  하양례(여, 1934년생,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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