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C020202 |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임선화 |
[동학 농민군이 쉬어 가던 곳]
여시뫼봉은 고창군 무장면 신촌리에 있는 왕제산의 다른 이름이다.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의 현장인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에서 직선거리로 약 1㎞ 가량 떨어진 이곳은 높이가 152m에 불과한 야트막한 산이지만, 사방이 시야에 들어오기 때문에 서해안의 물길을 바라볼 수 있다. 또한, 내륙으로부터 들어오는 관군의 움직임을 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무장기포를 준비하던 동학 농민군은 구수마을과 이곳에서 군사 훈련을 하며 농민 봉기를 준비하였다.
농민군은 3월 20일 구수마을에서 봉기한 뒤, 손화중ㆍ김개남의 농민군과 고창ㆍ무장ㆍ흥덕ㆍ정읍ㆍ태인ㆍ금구ㆍ김제 등지에서 모여든 8000여 명의 농민군을 백산에서 정비하였다. 농민군은 태인ㆍ금구ㆍ원평을 거쳐 전주를 향해 진격해 가다가 전라감영군의 움직임에 발맞추어 황토현에 진을 쳤다.
이곳에서 전라감영군을 물리친 농민군은 정읍ㆍ흥덕ㆍ고창ㆍ무장 등을 장악한 뒤, 여시뫼에서 3일 동안 머물며 대오를 정비하였다. 이곳에서 대오를 정비한 농민군은 전라도 서남부 12개 읍의 세곡을 운반ㆍ보관하던 영광 법성포 조창(租倉)을 장악하는 한편, 군대를 나누어 영광ㆍ함평을 연이어 점령하였고,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이학승이 이끈 경군(京軍)을 격파한 뒤 전주성에 입성하였다.
이처럼 여시뫼봉은 무장기포 당시에는 농민군이 군사 훈련을 하던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황토현 전투 이후에는 농민군이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기 위해 군대의 전열을 정비했던 농민군의 산실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김성칠과 관련이 있는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신촌마을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김성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나, 그의 후손들의 생사 여부는 어디에서도 알 수 없다.
[주민들을 보살펴 준다는 여시뫼봉]
여시뫼봉은 산의 지리적 형국과 관련하여 여시[여우]가 꼬리를 물고 있는 모양이라서 ‘여시뫼봉’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한 산에 선인봉과 옥녀봉이 있는데 선인과 옥녀 사이에 있다고 하여 왕제산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와 함께 왕제산의 ‘왕’자와 신촌마을의 ‘신’자를 두고 재밌는 해석을 내놓은 사람도 있다. 신촌마을 사람들은 왕제산을 ‘왕(王)’이라 하고 그 아래 신촌마을을 ‘신하(臣下)’라 하는데, 왕을 배산으로 두어 보살핌을 받기 때문에 신촌마을에서는 6ㆍ25전쟁 때도 전사자가 하나도 발생하지 않았고, 월남전에 참전한 마을 주민들도 모두 무사히 돌아왔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