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B0304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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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한미옥 |
[시집온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60년이야]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에서 ‘반암댁’으로 불리는 김수금[1925년생] 씨는 젊어서 9남매를 낳았지만 그 중 다섯을 내리 잃어버리고 이날까지 평생 가슴 속에 화병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 할머니는 친정인 아산면 탑정에서 열아홉에 혼례를 올리고 3년을 친정에서 살다가 1946년에 시댁인 진마마을로 들어왔다. 혼례를 올릴 당시[1944년] 신랑은 스물여덟 살이나 먹은 노총각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서 할머니는 잠시 웃는다.
“남자네 집이 쪼까 가난해 갖고. 가난해 갖고 내가 둘려서[속아서] 왔어. 여자들은 둘려, 까딱하믄 둘려. 그런디 지금 시상은 다 보고 서로 만나고 연애 걸고 그러고 허지마는 옛날에는 그것이 아니었었어. 집도 신랑네 집은 쬐깐한디 큰 집으로 비쳐 갖고. 둘려 갖고…….”
그렇게 속아서 시집온 것이 벌써 60년도 지난 일이다. 그래도 가난은 참을 만했다. 남편은 공부를 어느 정도 한 사람이라 마을에서 훈장도 하고, 자신은 길쌈이며 남의 집 바느질까지 해 주며 부지런하게 살았다. 덕분에 시집와서 남의 집 셋방살이 5년 만[1950년]에 번듯한 내 집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처음으로 가진 그 집에서 할머니는 자식 셋을 내리 잃어버렸다.
“집은 저~ 웃돔가[웃돔이라는 곳에] 긴디[있는데]. 그 집은 쪼그마 허고. 어쯔케 거그서 내가 아프기를 허고. 아그들을 거그서 서이나[셋이나] 날려 버리고. 그러고는 인자, 딸들을 그냥……. [그러다가] 곁방살이도 댕기도 어쯔고 허다가 그냥 이리 집 사 갖고 왔어.”
[가슴 속에 묻은 아이들]
김수금 씨는 처음으로 장만한 웃돔의 집이 자신과 운대가 맞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5년 만에 갖게 된 집이었지만, 그 집에 사는 동안 이유 없이 매일 몸이 아팠고 자식들도 그리 허망하게 날려 버렸으니 말이다. 결국 집을 팔고 다시 남의 집 곁방살이로 살다가 지금의 집터를 사서 오늘까지 살고 있는 할머니는 지금도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한숨을 내쉰다.
“몇 낳았냐그믄, 아홉 낳았어, 아홉. 겁나게 낳았당게. 그런게 [내가] 죄가 많은 개비여. 그런게 그렇게 많이 죽었제. 그래 갖고 내가 홧병 걸려 갖고 지금 심장, 심장병으로 이렇게 뽀뜨라져……. 애려서[어려서] 그런 놈[죽은 놈], 핵교 댕기다가 홍진[홍역] 허다가 그런 놈, 그냥 느닷없이 또, 그냥, 놀다가도 그냥, 풍 나갖고 그냥 그렇게 가 버리고 그랬어. 그래 갖고 가심[가슴]에 가서 뭉친 놈이 요만헌 놈이, 여그다 갖다가 콱 내려다 붙인게 숨도 못 쉬겄어 내가……. 그 전에는 손으로 바느질을 힜던 때라, 애기 조끼 해 줄라고 바느질 피어 놓고. 그놈을 못 입혔당게. 나갔다가 들어와서 그놈 붙잡고 내가 맘을 가라앉혀야겄다고, 붙잡고 일 헐라다가 못 허고. 명절 때 그놈 바느질 히서 못 입혔어.”
아이에게 입힐 조끼를 해 주려다가 잠시 밖에 나갔다 온 사이에 그렇게 허망하게 가 버린 아이를 붙잡고 그녀가 흘린 눈물이 또 얼마였을까. 같이 있던 대산몰댁과 난산댁 할머니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사연이었지만 자신의 일인 것처럼 같이 아파한다.
[그래도 정월 대보름이 제일 좋았지]
그렇게 산 세월 속에도 흥이 있었을까? 조사자가 마을 풍습에 대해 이것저것 묻자, “옛날에 당산제 제물 장만하는 것도 내가 다 장만했어.”라고 말하시면서 눈을 반짝거리신다. 그러면서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하던 줄다리기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하신다.
여자들이 이겨야 드는 풍년. 그나마 남은 자식들을 잘 키워 내기 위해서도 농사 풍년은 꼭 들어야 했으니, 당시에 줄을 당기던 반암댁 할머니의 손에도 한껏 힘이 들어갔을 것이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