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B010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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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자현 |
[혼불로 죽음을 예감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부터 인간이 이생에 태어나서 살다가 저승으로 갈 때가 되면 제일 먼저 그 혼이 몸과 분리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예전에 흔하게 듣는 이야기 중 하나가 “누구네 집에서 혼불이 나간 걸 보니 금방 초상을 치르겠더라.”는 이야기였다.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에서는 혼불의 모양을 보고 성별을 구분했다. 남자의 혼불은 기다란 모양이고, 여자의 혼불은 동글동글한 원형이라고 한다. 혼불이 떨어지는 거리에 따라서 죽는 시간을 추측하기도 했는데, 가까운 곳에 떨어지면 가까운 날에 초상이 나고 멀리 떨어지면 그만큼의 시일이 지나서 초상이 난다고 믿었다. 또한 진마마을에서 혼불이 떨어지는 장소가 그 혼과 관련된 명당자리라고 하여 어디로 가는지 유심히 살펴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 자리를 정확히 찾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혼불이 나간 뒤 사람이 죽으면 먼저 ‘사잣밥’을 차렸다. 대문 밖에 놓아 둔 밥 세 그릇과 짚신 세 켤레가 사잣밥이다. 그리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고인의 윗옷을 지붕 위로 던지면서 그 고을에서 가장 높은 관리인 원의 이름을 불렀다. 이는 고을 원이 누가 죽었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윗옷은 초상이 끝나면 지붕에서 내려 불에 태웠다.
시신은 몸이 굳기 전에 칠성판을 이용하여 반듯하게 펴 주었다. 근래 들어서는 질이 좋은 나무판을 칠성판으로 사용하지만, 예전에는 숨이 떨어지면 급한 대로 ‘문짝바라지[방문]’를 떼어서 칠성판으로 사용했다. 판자에 시신의 몸을 반듯이 펴고 왼쪽 방향으로 꼰 새끼를 이용하여 머리부터 발끝까지 일곱 군데에 매듭을 지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 염습을 할 때는 고인의 가족이나 가까운 일가친척이 참여했다.
[이승의 한을 풀어내는 「상여 소리」]
염습이 끝나면 입관을 했다. 만약 고인의 자식이 타지에서 늦게 도착할 경우에는 입관을 미루고 기다리기도 했지만, 날씨가 더울 때는 시신을 오래 보존하기 힘들기 때문에 호상이 입관을 진행하기도 했다. 호상은 집안사람 중에서 상례에 관해 잘 알고 있거나 인맥이 넓은 사람으로 선정했다. 부고장에 적힌 호상의 이름을 보고 조문을 오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었다.
입관이 끝나면 방문 밖에 작은 술상을 차려 간단하게 인사를 올렸으며, 고인의 자식들은 이때 평상복에서 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이후 가족과 친지들은 이승에서 작별 인사를 하듯 떠나 간 고인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담아 곡을 했다.
3일 초상이 끝나면 방안에 놓인 관을 들고 마당에서 발인제를 한 후 상여에 관을 넣고 운구를 했다. 이때 앞소리꾼이 풍경을 이용하여 장단을 맞추면서 애처롭게 소리를 했다. 「상여 소리」는 죽은 고인이 이승에서의 한을 풀고 저승으로 잘 가라는 의미를 담아 부르는 노래이다. 풍경은 소의 목에 매달던 종으로 앞소리꾼이 가지고 다니거나 마을에서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을 사용한다.
진마마을에서는 김갑성[1946년생] 씨의 작은아버지 김종운 씨가 「상여 소리」를 잘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종운 씨는 2006년에 80세의 나이로 세상과 이별하고 말았다. 김종운 씨가 고인이 된 뒤로는 선운리 신흥마을에 사는 안윤호[남, 1942년생] 씨가 그를 대신하고 있다. 마을에 초상이 나면 대부분 장례식장을 이용하지만, 장지로 가기 전에 마을회관 앞에서 노제를 지내고 꽃상여에 관을 올려 장지까지 운구하기 때문에 앞소리꾼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안윤호 씨는 국악에 관심이 많아 판소리와 풍물을 배우고 그것을 전수하기 위해 쉬지 않고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다.
진마마을에서 불리는 「상여 소리」에는 ‘관암보살’이 많이 들어간다고 한다. 제보자에게 「상여 소리」를 조금만 들려 달라고 부탁했더니, “황천길이 웬 말이냐, 관암보살 세어 보면 극락세계 뭐 어쩐다 저쩐다……[끝부분은 갑자기 기억나지 않아서 얼버무리듯이]”라고 짧게 부르고 만다. 망자의 넋을 위로하고 가족들의 회환을 달래 주는 「상여 소리」는 장지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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